“세계 최첨단 반도체가 미국에서 생산될 것이다.”
파격적인 보조금을 책정했던 만큼, 결실에 대한 기대감은 컸다. 국가 차원에서 추진 중인 미국의 초대형 반도체 생태계 프로젝트 청사진이다. 지나 러몬도 미 상무부 장관이 지난 14일(현지시간) 가진 브리핑에서 “삼성전자의 텍사스 첨단 반도체 공장 투자를 위해 반도체산업육성법에 의거, 64억 달러(약 8조9,000억 원)의 보조금을 제공할 예정이다”며 내비친 자신감으로도 들렸다. 그는 또 “조 바이든 대통령의 ‘인베스트 인 아메리카(미국 투자)’ 의제에 따라 또 한번의 역사적인 투자를 기념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삼성전자에 지원될 미 정부의 반도체 보조금은 자국 내 인텔(85억 달러·11조8,000억 원)과 대만 기업인 TSMC(66억 달러·9조1,000억 원)에 이은 3번째로 큰 규모다. 바이든 정부 주도로 도입된 반도체법(2022년 발효)은 첨단 산업과 관련, 글로벌 반도체 기업의 대미 투자를 유도하겠다는 방침 아래 입법됐다. 이 반도체법에 따르면 미국 현지 공장 건설 기업에 반도체 생산 보조금으로 총 390억 달러, 연구개발(R&D) 지원금으로 총 132억 달러 등을 포함해 5년간 총 527억 달러(약 73조 원)까지 지원, 가능하다.
반도체 패권 장악에 나선 미국의 야심이 무르익고 있다. 내로라한 세계적인 반도체 기업들에 보조금 지원과 더불어 자국 내엔 대규모 투자금이 동반된 생산기지 구축을 공격적으로 유치하면서다.
삼성전자도 이런 흐름에 동참했다. 64억 달러의 보조금을 지원받게 된 삼성전자는 현재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건설 중인 170억 달러(약 23조5,000억 원) 상당의 반도체 공장 규모를 확대, 2030년까지 총 450억 달러(약 62조3,000억 원)로 늘릴 방침이다. 이는 기존 투자 규모의 두 배 이상이다.
인공지능(AI)에서부터 빅데이터, 자율주행, 로봇 등을 골자로 한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반도체는 핵심이다. 하지만 미국엔 항상 빈약한 첨단 반도체 생산의 자생력 확보가 아킬레스건으로 지적된 것도 사실. 해외 의존도가 높았던 미국이 반도체법에 의거, 세계 유수의 기업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책으로 안정적인 공급망 확보에 나선 까닭이다. 앞서 첨단 반도체와 관련된 과감한 투자로 2030년까지 미국에서만 전 세계 최첨단 반도체 생산의 20%를 책임지겠다고 공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난달 20일엔 인텔에 보조금 85억 달러와 대출 110억 달러(약 15조1,100억 원)를 비롯한 195억 달러(약 26조8,000억 원)를, 이어 이달 8일엔 세계 최대 반도체 수탁생산(파운드리) 업체인 대만 TSMC에 보조금 66억 달러를 포함해 총 116억 달러(약 15조9,000억 원)까지 각각 지원하겠다고 밝힌 것도 이런 흐름의 연장선이다.
여기에 미국 기업인 마이크론테크놀로지도 합류할 분위기다. 17일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마이크론에도 조만간 60억 달러(약 8조3,000억 원) 이상의 보조금 지원 발표가 나올 예정이다. 마이크론은 뉴욕주와 아이다호주에 각각 4개, 1개씩 반도체 공장 건설 계획을 밝힌 바 있다.
미국 측의 이런 결단엔 그동안 반도체 분야에서 태생적으로 제기됐던 지정학적 리스크 해소 포석도 깔려 있다. 특히 세계 파운드리 시장에서 약 70% 점유율을 가진 대만의 경우엔 중국과 군사적으로 긴장 관계인 데다, 자연재해 등에 취약한 지대여서 불안감이 상존했다. 지난 5일, ‘규모 7.2’로 발생한 대만 강진에 전 세계 스포트라이트가 쏠린 이유도 이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글로벌 반도체 기업인 TSMC와 마이크론 등이 강진의 직접적인 영향권에선 떨어진 곳에 위치한 덕분에 큰 손실을 피했지만 안심할 순 없는 처지다. 세계 파운드리 1위 업체인 TSMC는 미국의 간판 기업인 애플과 엔비디아, 퀄컴 등에도 반도체 칩을 공급하고 있다. TSMC에 이상이 생긴다면 미국 정보기술(IT) 전자 업계에도 타격은 불가피하단 얘기다.
이처럼 외부 환경에 취약한 자국의 체질 개선용 특급 처방전으로 도입된 미 반도체법에선 최대 경쟁국인 중국과 관련된 국가에 한해 부정적인 ‘가이드라인’도 확실하게 제시하고 있다. 실제 미 정부의 반도체 보조금을 수령한 기업이 중국 내 생산라인에서 첨단 반도체를 5% 이상이나 28나노미터(1㎚=10억 분의 1m) 이전 세대의 범용 반도체를 10% 초과해 생산할 경우엔 보조금을 반환하도록 규정했다.
이렇게 자국 중심으로 설계된 반도체법은 지역 경제 활성화까지 견인할 태세다. 당장, 현지에선 일자리 창출에 대한 장밋빛 전망부터 쏟아지고 있다. 삼성전자에 대한 미 정부의 64억 달러 보조금 지원 소식에 현지 지역매체들은 “삼성과 미국의 반도체 거래가 텍사스에 2만1,000개의 일자리를 가져올 것으로 보인다”며 긍정적인 평가를 내놓고 있다. 이 지역 일간지인 텍사스 트리뷴도 "현재 계획된 제조·연구시설 클러스터는 최소 1만7,000개의 건설 일자리와 4,500개 이상의 생산직 일자리를 창출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전했다. NBC 계열 지역방송사 KXAN에선 "삼성전자가 텍사스 테일러시에 400억 달러(약 55조 원) 이상을 투자해 반도체 생산 시설을 짓게 된다"며 "이는 지역의 인력 양성과 개발에 활용되고 최소 2만1,500개의 일자리도 가져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올해 11월, 대선을 앞둔 바이든 대통령 역시 반도체법을 최대한 정치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지난달 20일, 바이든 대통령이 인텔에 반도체법에 따른 역대 최대 보조금 지원 방침을 밝힌 애리조나주는 대선 승패에서 중요한 경합주로 꼽히는 곳이다.
한편, 15일 영국 일간지인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바이든 대통령의 경제 정책에 대한 유권자들의 지지도는 상승세를 타고 있다. FT와 미국 미시간대 로스 경영대학원이 이달 4일부터 5일 동안 미국 내 유권자 1,01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결과, 반도체법 등이 포함된 바이든 대통령의 경제 정책 지지율은 지난달 조사보다 5%포인트 오른 41%를 기록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최근 대기업 규제와 기업 및 고소득층 과세 강화 등에 주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