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럽다” 했지만 지쳐 보인 트럼프… 피고인석 앉은 첫 미국 대통령의 하루

입력
2024.04.16 15:30
14면
맨해튼서 ‘성추문 입막음’ 재판
“박해” 외치더니 조용… 졸기도
민주 텃밭… 배심원 선정 난항

15일 오전 9시 30분(현지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지방법원.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일찌감치 도착했다. 공금으로 ‘성추문 입막음 돈’을 주고 이를 감추려 회사 장부를 꾸몄다는 혐의로 지난해 3월 재판에 넘겨진 그는 1년여 만에 드디어 법정 피고인석에 앉는 첫 미국 대통령이 될 참이었다.

오전: 다른 입막음, 망신 예고

공화당 대선 후보인 트럼프 전 대통령은 기고만장했다. 뉴욕타임스(NYT) 등 미국 언론에 따르면 출두 전 법원 앞에서 취재진을 만난 그는 “이것은 정치적 박해”라며 “여기에 오게 돼 자랑스럽다”고 거침없이 말했다.

그러나 재판을 맡은 후안 머천 판사 앞에서는 달랐다. NYT에 따르면 그는 구부정하게 섰고, 노려봤고, 비웃었다. 그리고 조용했다. 간간이 변호인단과 속삭였을 뿐이다. 다만 사전 변론 내내 짜증을 내거나 지친 기색을 보였고, 머천 판사가 마지막 쟁점 변론을 듣는 동안에는 조는 듯 머리를 꾸벅이기도 했다.

판사 기피 신청은 다시 거부됐다. 머천 판사 딸이 민주당 정치 컨설턴트로 일했기 때문에 공정한 재판을 기대할 수 없다며 재판 시작과 함께 판사 교체를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머천 판사는 다음 달 막내아들 졸업식 날 재판은 쉬어 달라는 트럼프 전 대통령 측 부탁도 일축했다.

망신살이 예고되기도 했다. 타블로이드지 내셔널인콰이어러의 전 대표 데이비드 페커와 성인잡지 모델 출신 배우 캐런 맥두걸을 증인으로 채택해 달라는 검찰 측 요청을 머천 판사가 수용하면서다. 둘은 트럼프 전 대통령의 다른 입막음 시도 사례에 연루된 인물이다. 2016년 대선을 앞두고 맥두걸이 트럼프 전 대통령과의 혼외 관계를 폭로하려 하자 내셔널인콰이어러가 15만 달러(약 2억 원)로 독점 보도권을 사들인 뒤 묻어 버린 것으로 검찰은 보고 있다.

검찰은 오전 내내 트럼프 전 대통령을 괴롭혔다. 점심 직전에는 판사의 함구령을 어기고 그가 소셜 미디어에 핵심 증인인 스토미 대니얼스와 마이클 코언을 공격하는 글을 올렸다며 벌금 3,000달러(약 420만 원)를 매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니얼스는 2016년 대선 직전 입막음 돈을 받은 트럼프 전 대통령의 성관계 대상이고, 코언은 돈을 전달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당시 개인 변호사라는 게 기소 내용이다.

오후: “공정할 자신이 없다”

오후에는 오전부터 기다린 배심원 후보들이 법정에 들어왔다. 사실 이날 재판 목적이 배심원단 선정이었다. 머천 판사는 이들 96명에게 사건 개요를 설명한 뒤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자신이 공정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 손을 들라고 요청했고, 자진 사퇴한 이가 50명이 넘었다.

머천 판사는 남은 각 후보를 상대로 42개의 준비된 질문을 했다. 뉴스를 어디서 주로 접하느냐, 트럼프 선거 운동에 참여하거나 ‘반(反)트럼프’ 조직에서 일한 적이 있느냐 등이다. 2020년 대선에서 유권자 87%가 조 바이든 대통령을 선택한 맨해튼인 만큼 12명 배심원단도 민주당 일색이 되지 않겠냐는 게 트럼프 전 대통령 걱정이라고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전했다. 쉽지 않은 공정성 담보 탓에 곤란하기는 재판부도 마찬가지다. 실제 배심원이 한 명도 선정되지 않은 채 첫날 일정이 끝났다.

법원 밖에는 시위대와 기자들, 위성 뉴스 중계차 등이 보였는데 ‘친(親)트럼프’는 소수였다는 게 WSJ 묘사다. “트럼프는 법 위에 있지 않다”는 구호가 들렸다고 신문은 전했다. 재판은 수요일을 제외한 주중 4회, 오전 9시 30분부터 7시간 열리고 형사 피고인인 트럼프 전 대통령은 6~8주가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 재판 일정 내내 자리를 비워서는 안 된다. 11월 대선까지는 200일 남짓 남았다.

워싱턴= 권경성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