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국빈 방문 중인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미 의회 연설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물론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까지도 신경 쓴 메시지를 내놨다. 두 사람 모두 11월 미 대선에서 재선에 도전하는 만큼, 승자가 누가 되더라도 이번 정상회담으로 쌓아 올린 '미일 동맹관계'를 지켜내겠다는 구상이다. 그러나 9년 전 아베 신조 전 총리도 언급했던 '과거사 반성'에 대한 내용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기시다 총리는 11일(현지시간) 미 의회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에서 "세계가 미국과 미국의 리더십을 바라보고 있지만, 미국이 모든 것을 도움 없이 혼자 할 것으로 기대해서는 안 된다"며 "일본인들은 미국의 가장 가까운 친구로서 미국과 함께하겠다"고 밝혔다. 일본 총리의 미 의회 연설은 2015년 4월 아베 전 총리 이후 9년 만이며, 상·하원 합동 연설은 아베 전 총리 이후 두 번째다.
기시다 총리는 국제사회 속 미국의 역할을 강조하며 바이든 대통령에게 힘을 실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지원을 언급한 것이 대표적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추가 지원 예산안을 처리하려고 하지만, 공화당의 반대에 막힌 상태다. 기시다 총리는 "오늘날의 우크라이나는 동아시아의 내일이 될 수 있다"며 "미국의 리더십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바이든 대통령만 챙긴 것은 아니다. 기시다 총리는 일본 방위비를 국내총생산(GDP) 대비 2%까지 증액했다며 "미국은 혼자가 아니다. 우리가 함께한다"고 말했다. 아사히신문은 "기시다 총리가 트럼프 전 대통령의 존재도 의식한 것 같다"며 "일본이 미국의 부담을 적극적으로 지겠다는 결의를 드러낸 이유"라고 짚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재임 시 일본에 방위비 분담금을 4배로 늘려 요구한 적이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 측과 가까운 공화당 인맥의 지원을 받은 점도 성과다. 기시다 총리의 미 의회 연설이 성사된 데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측근으로 알려진 윌리엄 해거티 상원 의원(전 주일 미 대사)과 마이클 매콜 미 하원 외교위원장이 마이크 존슨 하원 의장에게 서한을 보낸 것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모두 공화당 소속이다. 요미우리는 "이번에 공화당의 협력을 얻은 것은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선 가능성을 염두에 둘 때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기시다 총리가 이날 도요타의 전기차 배터리 공장 건설 부지가 있는 노스캐롤라이나주(州)를 방문한 것도 트럼프 전 대통령을 염두에 둔 일정으로 꼽혔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동맹국이 적보다 미국을 훨씬 많이 이용해 먹는다"며 대일 무역 적자를 여러 차례 문제 삼았다. 마이니치신문은 "일본 기업의 투자로 미국에서 고용이 발생하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방문"이라고 짚었다.
한편 기시다 총리는 34분간 영어로 연설하며 과거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9년 전 아베 전 총리는 "우리는 전쟁(2차 세계대전)에 대한 깊은 반성의 마음으로 전후를 시작했다. 우리는 그것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지만, '식민지배', '침략' 등 핵심 용어와 사죄 표현을 쓰지 않아 비판받았는데, 기시다 총리는 '반성'조차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아베 전 총리는 당시 "역대 총리들에 의해 표현된 관점들을 계승하겠다"고 말했으나 기시다 총리는 이마저도 잇지 않은 셈이다. 요미우리는 "이번에는 과거에 대한 반성은 포함하지 않고 철저히 미래 지향을 고집했다"는 일본 정부 관계자의 말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