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사, 삶의 죽음의 새로운 경계를 획정하다

입력
2024.04.15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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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 알렉상드르(Guy Alexandre)

옛사람들은 심장을 생명과 영혼의 원천이라 여겼다. 고대 이집트 정의의 여신 마트(Maat)는 망자의 심장을 저울에 달아 영생-소멸을 판가름했고 제우스의 독수리는 프로메테우스의 심장 대신 간을 노림으로써 영원한 형벌을 추구했다. 구석기 유럽 크로마뇽인은 동굴 벽에 하트 문양의 그림을 남겼다. 그 의미는 알 수 없지만, 심장의 형이상학은 어쩌면 문명의 신적 상상력보다 훨씬 앞서 생겼을지 모른다.
심장의 형상인 하트 문양이 사랑을 상징하게 된 기원도 사실 불분명하다. 고대 그리스의 성 발렌티노가 로마 군인들의 비밀 결혼식을 집전하며 신의 가호를 기리는 의미로 하트 문양을 썼다는 설이 있지만, 중세 유럽인들이 예수의 사랑, 곧 성심(Sacred Heart)을 심장(하트)으로 형상화했다는 건 도상학적 진실이다. 그게 세속의 기호로 확장된 흔적은 13세기 프랑스 한 무명 작가가 남긴 이야기책 ‘배의 노래(Roman de la poire)’ 속 삽화로 남아 있다. 그림 속 남성은 여인에게 무릎 꿇고 구애하며 자신의 심장(하트)을 바친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그림문자 중 하나인 하트와 원관념으로서의 심장은 종교적 신앙과 세속의 이념·정념의 발원지로서, 문명보다 오래 그 상징적 지위를 누려왔다.
저 유구한 상징은 맥박과 호흡이라는 감각적 물증으로 지탱됐다. 고대 이래의 의사들이 사망 진단의 결정적 근거로 삼아 온 것도 맥박과 호흡이었다. 인류의 모든 궁극적 사인은 심폐사(心肺死)였다.
거칠게 말하자면 18세기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 이래 철학과 뇌과학은 저 오래된 형이상학의 세계를 의심-부정하기 시작했다. 19세기 과학자들은 뇌에서 포착한 전기적 현상(펄스)이 근육 운동에 간여한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20세기 뉴런 과학자들은 뇌의 각 부위가 육체뿐 아니라 영혼의 움직임에도 간여한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확인했다.
하지만 오랜 문화와 통념에 뿌리내린 심장의 형이상학을 흔드는 데는 실패했다. 인류는 생리식염수 안에서 움찔대는 심장의 영상을 보고 인공 심장까지 만들어냈지만, 호머와 셰익스피어의 숱한 후예들이 시와 노래로 굳혀 온 그 상징을 발렌타인 초콜릿과 손가락 하트로 계승하고 있다.

저 오랜 흐름에 비춰 볼 때, 1960년대 처음 등장해 가히 눈부신 속도로 세상을 설득해온 ‘뇌사(腦死)’라는 개념, 즉 심장이 어쩌든 뇌가 죽으면 죽은 거라는 신경학적 진단은 가히 단절에 가까운 문명사적 도약이었다.
그 초월적 도약이 1963년 6월 3일 벨기에 뢰번(Leuven, 루뱅)의 한 병원 수술실에서 가이 알렉상드르라는 당시 29세 무명 외과의에 의해 시작됐다. 그는 교통사고로 심각한 뇌손상을 입고 회복 불능의 의식 불명 상태로 장기 입원한 한 여성의 배를 열어 신장을 적출, 만성 심부전으로 생명이 위태롭던 환자에게 이식했다.
신장을 이식받은 환자는 당시로선 획기적으로 87일을 더 생존했다. 알렉상드르는 이후 약 2년 간 유사한 조건에서 9건의 신장 이식 수술을 집도한 뒤 65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장기 이식-생명윤리 관련 첫 국제의학자대회에서 그 사실을 발표했다.
대다수 의학서적은 1968년 미국 하버드 의대 특별위원회의 이른바 ‘비가역적 혼수상태(irreversible coma) 보고서’가 뇌사 즉 신경학적 죽음의 정의를 확립했다고 설명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 보고서는 5년 전 알렉상드르의 집도와 3년 전 의학자대회 주장에 대한 사후 동의(인정)인 셈이었다. 보고서 발표 직후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제22차 세계의학총회 참가자들은 ‘인간의 죽음에 관한 시드니 선언’으로 하버드 보고서에 동조했고, 71년 핀란드의 ‘시신 조직 적출에 관한 훈령’을 시작으로 뇌사자의 장기 적출에 대한 법적 장치들이 마련되기 시작했다.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소신과 용기로 뇌사라는 죽음의 새 패러다임을 정립함으로써 뇌사-장기 이식을 활성화하고, 결과적으로 수많은 이들에게 희망과 새 삶을 선사한 가이 피에르 장 알렉상드르(Guy Pierre Jean Alexandre)가 별세했다. 향년 89세.

가이 알렉상드르는 1934년 벨기에 브뤼셀 교외 우클(Uccle)에서 공무원 아버지와 사기업 비서로 일하던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 59년 뢰번대 의대를 졸업했다. 전공의 시절 장기 이식 수련을 받은 뒤 61년 하버드 의대 펠로로 도미, 54년 조지프 머리(Joseph Murray)가 일란성 쌍둥이 신장 이식수술에 처음 성공한, 하버드대 협력병원인 브리검 여성병원(당시 Peter Bent Brigham 병원)에서 2년 간 근무했다. 어느 날 그는 머레이의 수술실에서 ‘기이한(curious) 현상’을 목격한다. 신장 공여자의 인공호흡기를 끈 뒤 심장이 멎기를 기다렸다가 적출 수술을 시작하는 장면이었다. 모든 장기는 산소 공급이 중단된 순간부터 빠르게 손상되고, 크든 작든 손상된 장기는 이식 후 경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는 심폐사 기준 때문에 감수하던 그 '무의미한 손실'을 납득하지 못했다.

19세기 말 혈관봉합술이 개발되면서 본격화한 현대 장기 이식의 역사는 한마디로 실패의 연속이었다. 60년대 초부터 AZT(Azathioprine,1961) 등 면역억제제들이 잇달아 등장해 장기 이식의 생물학적 최대 난관이던 이식거부반응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비로소 열렸다. 이후 장기 이식의 관심은 수술의 기술적 성패보다 이식 후 환자 생존율로 무게중심이 옮겨갔다. 알렉상드르가 보기에 심폐사에 대한 의료계의 집착은 장기 이식이 극복해야 할 관습적 형이상학적 난관이었다.

벨기에로 돌아와 뢰번의 생피에르의대 외과의가 된 그는 당시 외과과장(Jean Morelle)을 설득, 어렵사리 동의를 얻은 뒤 63년 저 수술을 감행했다. 그 수술은, 장기기증 홍보 활동가 로버트 버먼의 말처럼 “현대 의학 역사상 심장이 살아 있는 인체에서 장기를 적출한 첫 수술”이자 “죽음에 대한 관습적 정의에 메스를 가한 첫 수술"이었다.

알렉상드르는 65년 의학자대회에서 장기 공여 뇌사자를 ‘심장이 뛰는 시신(heart beating cadaver)’이라 명명, 이식분야의 기라성 같은 참가자들을 경악시켰다. 백혈구 등 혈액수치를 근거로 면역억제제의 양을 조절하는 정교한 기법으로 신장이식 분야의 일인자로 꼽히며 67년 세계 최초로 간 이식에 성공한 미국 콜로라도대 외과의 토머스 스타즐(Thomas Starzl)은 “자신의 수술팀 누구도 심장이 뛰는 환자를 사망자로 여기지 않는다”고 말했고, 면역억제요법의 선구자 로이 칼네(Roy Calne)는 “알렉상드르의 행위는 장기 기증-이식 분야 전체를 불명예스럽게 만들 것”이라고 질타했다. UC버클리 법학교수 겸 의료윤리 권위자 데이비드 루이셀(David Louisell)은 “살인죄로 기소될 수도 있는 위험한 행위”라고 경고했다. 행사 말미에 참가자들은 알렉상드르의 ‘뇌사’개념에 대한 동의여부를 거수로 확인했다. 손을 든 사람은 알렉상드르 혼자뿐이었다.

그는 자신을 살인자라고 비난하던 이들을 위선자라고 반박했다. “그들은 심장이 뛰는 뇌사 환자를 살아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장기 적출 전 인공호흡기를 끄고 심장 박동을 멈추게 하는 데는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그건 살인 아닌가?” “(그들은) 환자를 죽이는 것도 모자라 공여할 신장마저 산소결핍으로 손상시켰다. 그 신장들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

하버드 의대 특별위원회는 68년 8월 ‘비가역적 혼수상태의 정의’란 보고서에서 “우리의 주요 목적은 비가역적 혼수상태를 사망의 새로운 기준으로 정의하는 것”이라며 소생술과 연명치료 기법의 발전으로 치명적이고 영구적인 뇌 손상을 입고도 심장 박동을 유지하는 환자들이 생겨나는 현실과 그로 인한 병상 등 자원 낭비와 비용 부담, 심폐사의 ‘낡은 기준(Obsolete criteria)’이 야기할 수 있는 이식용 장기 확보를 둘러싼 논란 등을 언급했다. 보고서는 원인 질환이 있고, 치료가 불가능한 뇌병변이 있고, 자발적 호흡이 불가능하고, 동공 및 뇌간 반사가 없을 경우 뇌사로 판정할 수 있다는 뇌사 판정 5대 기준을 함께 공개했다. 보고서의 요지는 물론이고 저 뇌사판정 기준도 모두 3년 전 알렉상드르가 발표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보고서에는 그의 이름도 언급되지 않았다.

로버트 버먼은 65년의 의학계가 불과 3년 만에 180도로 돌아선 배경에 뇌사자 장기 이식의 잇단 성공과 그에 따른 말기 환자들의 절박한 기대 및 기증 장기에 대한 수요 증가가 있었다고 분석했다. 남아공 외과의 크리스천 버나드(Christian Barnard)가 뇌사자에게서 기증받은 심장으로 사상 최초로 심장이식 수술에 성공한 게 반 년여 전인 67년 12월이었다.

알렉상드르는 63년의 뇌사자 가족에게 장기 적출 동의는커녕 자신의 계획조차 알리지 않고 수술을 감행했다. 그는 버먼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뇌사자 가족에게 상태가 심각하다는 사실만 알렸고, 수술 다음날 사망 사실을 통보했다”고 말했다. “벨기에에서는 검시관이 가족 동의 없이 부검을 명령할 수 있고, 프랑스나 영국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의사도 다른 환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가족 허락 없이 시신에서 장기를 적출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솔직히 말해 인공호흡기를 끄고 장기를 적출한 의사들도 사전에 가족 동의를 받은 기억이 없다”고 말했다. 그의 판단은 지금의 보편적 의료윤리에 비춰 정당화하기 힘들지만, 당시는 법적 제도적 규제 근거가 없었다. 벨기에 의회는 1986년에야 법을 제정, 뇌사자가 사전에 장기 기증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지 않은 한 의사가 가족 동의 없이 이식용 장기를 적출할 수 있도록 했다.

뇌사는 죽음인가, 죽음의 과정인가 등 뇌사 개념을 둘러싼 생명윤리학계의 논란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와 병행해 개별 국가와 국제사회의 의료생명윤리 기준 역시 꾸준히 개선돼 왔다. 국가별 뇌사 판정 및 장기 이식에 대한 법적 기준과 절차는 다양하지만,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파키스탄과 루마니아 등 일부를 제외하고 장기 이식 의료 기술과 지식을 갖춘 대다수 국가가 뇌사에 대한 법적 제도적 프로토콜을 마련해 두고 있다. 법적으로 심폐사만 인정하는 한국도 1998년 12월 ‘장기 등 이식에 관한 법률’을 제정, 2000년 2월부터 환자가 장기 기증 요건에 부합하는 경우 의사 및 법률가로 구성된 뇌사판정위원회를 통해 뇌사를 인정한다.

알렉상드르는 자신을 향한 비뚜름하던 시선에 적어도 겉으론 의연했고, 뇌사- 장기 이식 성취의 공식 연표에서도 소외-배제된 현실에도 연연해하지 않고 평생 소신을 실천했다. 그는 85년 혈장분리-항체 제거법으로 혈액형이 다른 기증자의 신장 이식 수술에 최초로 성공함으로써 장기 이식의 벽 하나를 또 허물었고, 말년까지 동물의 장기를 사람에게 이식하는 이종 장기 이식 연구에 매진했다. 그는 58년 일레인 모옌스(Eliane Moens, 2023년 작고)와 결혼해 1남 4녀를 낳고 해로했다.
이종 이식 연구를 선도해온 미국 버밍엄 앨라배마대 교수 데이비드 쿠퍼(David K.C. Cooper)는 2020년 학회지 ‘이식면역학(Transplant Immunology)’에 발표한 에세이에서 "윤리적 딜레마에 두려움 없이 맞서 뇌사의 인정과 장기 이식 활성화를 이끈 선구자"로 가이 알렉상드르를 호명하며, 그 공에 걸맞은 학계의 인정을 받지 못한 사실도 함께 환기했다.

알렉상드르의 조국 벨기에는 국민 44%(2021년 기준)가 임신중단 선택권조차 부정할 만큼 생명을 중시하는 가톨릭교회 신자다. 그가 대학을 다니던 50년대에는 가톨릭 인구가 전체의 80% 이상이었고, 그 역시 평생 가톨릭 신자로 살았다. 가톨릭교회는 2000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신경학적 죽음을 공식 인정했고, 앞서 교황 비오 12세도 1957년 멘델연구소가 주최한 가톨릭의사회 모임에서 '원칙적으로 죽음은 종교적-윤리적 차원이 아닌 의사의 판단에 의해 결정될 사안'이라고 밝힌 바 있다. 교회 내부의 이견과 우려는 물론 지금도 없진 않다.
가톨릭 주석 성경 시편에는 “인간은 한낱 그림자로 지나가는데/ 부질없이 소란만 피우며 쌓아 둡니다/ 누가 그것들을 거두어 갈지 알지도 못한 채”라는 구절이 있다. 말년의 알렉상드르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이 우주에서) 우리는 모두 티끌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환자에게서, 다시 말해 시신에서 장기를 떼어내는 것, 먼지 조각 하나 떼어내는 것일 뿐이지.”





최윤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