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칸, 성소수자 견해 오락가락… “성전환은 인간 존엄성 위협”

입력
2024.04.09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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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환 시도는 신에 도전하려는 욕구"
선언문 '무한한 존엄'서 성소수자 비난
"적대 세력에게 곤봉 쥐여준 꼴" 반발

교황청이 트랜스젠더의 성확정(성전환) 수술을 ‘인간 존엄성에 대한 모독’이라고 선언했다. 기존 가톨릭 교리를 재확인한 것이지만,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이 강조하던 성소수자 친화적인 메시지와 상반된다. 가톨릭 내 진보진영은 즉각 반발했다.

8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포스트(WP) 등에 따르면, 교황청 신앙교리성은 이날 ‘무한한 존엄성’이라는 제목의 20쪽 분량 선언문에서 이같이 밝혔다.

"인간 존엄하다"면서도 성소수자는 제외?

이 선언문은 교황청이 '무엇이 존엄한지' 재확인하는 취지에서 작성됐다. 1953년 유엔 세계인권선언이 채택된 지 75년이 지난 시점에서, 인간 존엄성의 현주소를 훑어보겠다는 것이다. 실제 선언문에는 가난한 사람, 이주민, 여성, 어린이 등에 대한 착취가 인간에 대한 모욕이라는 내용 등이 포함됐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언문을 검토·승인·서명했다고 교황청은 밝혔다.

다만 이목은 트랜스젠더에 대한 진술에 집중됐다. 선언문에 성전환을 강도 높게 비난하는 내용이 포함됐기 때문이다. 선언문은 “모든 성전환 개입은 그 사람이 받은 고유한 존엄성을 위협할 위험이 있다”며 “스스로 신이 되려는 해묵은 유혹”에 해당한다고 적시했다. 생물학적 성별과 스스로 느끼는 성별이 일치하지 않는 트랜스젠더가 신체를 바꾸려 시도하는 것을 ‘신에 대한 도전’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AP통신은 “트랜스젠더 개인은 환영하지만 성전환이라는 이데올로기는 거부하는 오랜 신념과 일치한다”고 짚었다.

"교회, 이 문제에는 말을 더듬는다"

가톨릭 성소수자 연대 단체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선언문이 인간이 사랑받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도 그 대상에서 성소수자는 제외했다”는 것이다. 그간 성소수자 친화적 행보를 보여 온 프란치스코 교황이 보수 세력 반발을 달래기 위해 일관성 없는 모습을 보였다는 지적도 나왔다. 가톨릭 성소수자 연대 활동가 이노센조 폰틸로는 WP에 “교회가 성소수자 문제에 대해서는 말을 더듬고 있다”고 말했다. 교황은 지난해 가톨릭 사제의 성소수자 축복을 허용하는 선언문에 서명한 후 보수 가톨릭 일각에서 ‘이단’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비판을 의식한 듯 교황청도 선언문에 단서 조항을 담기는 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성적 지향 때문에 행복을 박탈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인간 존엄성에 어긋난다”고 덧붙인 것이다. 국민 대다수가 기독교인인 아프리카 우간다 등에서 성소수자처벌법을 제정·시행하는 상황을 우회적으로 견제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미국 뉴욕타임스는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소수자 신도들이 소외감을 느끼는 교리에 대해서는 꿈쩍도 하지 않음으로써 포용성을 향한 노력에 한계를 드러냈다”며 “이들은 이 선언문이 자신들에 대한 ‘곤봉’으로 사용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고 짚었다.

김현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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