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에 중고 아이폰 6S를 14만 원에 사서 지금까지 잘 썼어요. 다만 배터리가 문제죠. 오래 써서 그런지 방금 전엔 50%였는데 10분 뒤 20%로 뚝 떨어져 있고 그래요. 보조 배터리 없으면 외출을 못 하니 친구들도 그만 보내주라고 했죠."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서울환경연합에서 '수리상점 곰손'이 연 '아이폰 배터리 교체 자가 수리 워크숍'을 찾은 이선경(31)씨의 말입니다. "140만 원짜리 최신형 아이폰15를 살까 잠깐 고민도 했지만, 배터리만 바꿔도 잘 쓸 텐데 굳이 (중고폰) 10배 돈을 주고 새것을 사야 될까 싶었어요." 재단법인 숲과나눔, 서울환경연합 지원 덕에 이날 참가비는 배터리값, 공구 대여료 등을 합쳐 4만5,000원이었죠. 공식 배터리 교체비(10만~14만6,000원)의 절반 내지 3분의 1 값입니다.
'더 오래 쓰고 싶다' '음악 듣거나 사진 찍는 서브(보완)폰으로 쓰고 싶다' 등 제각기 소망을 품은 10명이 구형 아이폰을 들고 모였습니다. 40분은 '수리권' 강의를 듣고, 2시간여 동안 강사님 지도하에 차근차근 '아이폰 해체'에 돌입했죠. 휴대폰을 열판에 '구워' 액정과 본체를 분리하고, 기판을 연결하던 초소형 나사를 하나하나 조심스레 풀어내고, 마지막으로 테이프로 고정됐던 배터리도 분리해 내면 '거의 성공'입니다. 새 배터리를 넣고 역순으로 조립하면 끝입니다.
수리를 마친 아이폰에서 '사과 로고'가 뜨자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습니다. "대박 사건!" "이게 되네, 너무 신기하다"라고요. 짱짱한 새 배터리를 얻은 선경씨도 "정들었던 휴대폰인데 바꾸지 않아도 돼서 너무 좋다"고 했습니다.
'물건을 오래 쓰는 일'은 고물가 시대에 지혜로운 소비 습관이 될 수 있을뿐더러, 환경에도 큰 도움이 되는 기후행동입니다. 불필요한 생산을 줄여 자원 낭비, 환경 파괴, 탄소 배출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되거든요.
유럽환경국(EEB)은 2019년 보고서에서 유럽 내 모든 스마트폰 수명을 1년만 연장해도 2030년까지 매년 210만 톤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일 수 있다고 추산했어요. 이는 100만 대 넘는 차량이 1년간 내뿜는 양에 맞먹습니다. 유럽 내 스마트폰, 노트북, 세탁기, 청소기를 5년씩만 더 써도 2030년까지 연간 1,000만 톤을 감축할 수 있다고 하고요.
이런 상황에서 최근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게 '수리권'(Right to repair)입니다. 좀 생소하시죠. 'AS 센터 가면 되지, 수리권은 뭐지' 싶고요. 그 질문에 녹색전환연구소 부소장 지현영 변호사는 이렇게 답합니다. "수리비가 너무 비싸서 차라리 새 제품을 사는 게 낫거나, '제조사에서 부품은 최소 몇 년 이상 보관해야 한다'는 규정이 없다면 소비자가 수리하고 싶어도 선택권이 없다"고요.
실제로 서울환경연합이 지난해 시민 261명을 대상으로 제품 수리를 시도했지만 실패한 이유를 조사했더니, '필요한 부품을 못 구해서'(43.7%), '수리비가 비싸서'(22.6%), '수리 맡길 곳을 못 찾아서'(13.7%) 등의 이유가 꼽혔습니다.
그래서 수리권은 단순히 '보증기간 내 수리받을 권리'만 뜻하는 게 아니라, 자가 수리나 사설 수리 업체도 부품과 장비를 제공받을 권리, 소비자가 수리 방식과 업체를 선택할 권리도 포함해요. 더 나아가 제품 설계·생산 단계부터 '수리가 쉽고 수명이 긴 제품'을 만들어야 하며, 제품 구매 시 수리 정보가 투명하게 제공돼야 한다고 환경·시민단체들은 요구합니다.
생산 단계부터 수리권을 강조하는 것은, 제조사들이 새 물건을 더 팔기 위해 고치면 충분히 쓸 수 있는 제품도 '후져 보이게' 마케팅하거나, 수리를 어렵게 하거나, 심지어 의도적으로 성능을 저하시키는 방식에 제동을 걸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계획적 진부화'라고 하는데요. 한 예로 2017년 아이폰 소프트웨어를 업데이트하면서 구형 모델 성능을 일부러 저하시켰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사실로 밝혀져 세계 곳곳에서 수천억 원대 배상을 해야 했죠.
구매 단계에서는 '투명한 정보 제공'이 필요합니다. 대표 사례로 프랑스는 2021년부터 스마트폰·노트북·텔레비전 등 전자제품에 대해 고장 시 수리 가능 정도를 1~10점 척도로 매겨 고지하도록 의무화하고 있습니다. 소비자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해 '오래 쓰기'를 장려하는 취지죠. 미국 몇몇 주들은 이미 자동차, 전자제품 등의 수리권을 법제화한 상황이고, 바이든 행정부 차원에서도 빅테크 규제의 일환으로 수리권 보장을 추진 중입니다.
반면 한국은 아직 '수리권' 개념조차 생소한 단계예요. 2022년 12월 통과된 '순환경제사회 전환 촉진법'에 수리권 관련 내용이 일부 담겼지만, 한계도 뚜렷합니다. 구체적인 품목·의무 사항 등은 대통령령에서 정할 영역으로 남아 있고, 그마저도 강제 규정이 아니라 '노력한다'고 돼 있거든요.
고은솔 서울환경연합 자원순환팀 활동가는 "어떤 품목에 어떻게 적용될지 대통령령에 정해진 내용이 아직 없어 효력이 의문스러운 상태"라고 지적했습니다. 지현영 변호사는 "소비자 운동 측면에서 미국·유럽 같은 법을 한국도 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져야 하는 단계"라며 "미국 같은 경우 바이든 대통령이 먼저 나서 수리권 관련 행정명령을 서명한 만큼 정부 의지도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