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발, 두발, 세발 물러선 정부… 의사들 ‘합리적 대안 제시’ 응답할까

입력
2024.04.02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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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대통령 "전공의들 만나겠다" 전격 제안
전공의 처분 유예, 증원 규모 재검토 '양보'
의사들 "증원 백지화", 대안 제시에 미온적
인턴 임용 포기 잇따라, 의료체계 타격 우려

윤석열 대통령이 ‘의대 증원 2,000명 재검토’ 여지를 열어 놓은 데 이어 전공의들과 직접 만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의정 갈등이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다만 아직 의사들이 ‘증원 백지화’ 요구를 굽히지 않고 있고 “합리적인 의대 증원 방안을 제시해 달라”는 윤 대통령 요청에 미온적인 반응이라 단시간에 해법이 나오긴 쉽지 않아 보인다. 정부가 전공의 행정처분 보류 결정을 시작으로 연거푸 뒤로 물러선 만큼, 의사들도 무조건 반대가 아닌 합리적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윤 대통령 "전공의 만나겠다" 전격 제안

대통령실은 2일 공지를 통해 “윤 대통령은 의료계 단체들이 많지만, 집단행동 당사자인 전공의들을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며 “대통령실은 국민들에게 늘 열려 있다”고 밝혔다. 이어 “대통령은 누구보다 대화에 진심”이라며 “의료개혁을 위해 의료진과의 적극적 대화가 필요하다고 수차례 강조했고, 그런 차원에서 전공의에게 손을 내민 것”이라고 전했다.

이날 교수단체에서도 대통령과 전공의의 만남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조윤정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전의교협) 홍보위원장은 언론 브리핑에서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 대표에게 부탁한다”며 “윤석열 대통령이 마음에 들든 안 들든 그분은 우리나라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이다. 그분이 박 대표를 초대한다면 아무런 조건 없이 만나 보라”고 조언했다.

공교롭게도 전의교협 브리핑 이후 대통령실 공지가 나와, 의사들 제안에 대통령이 화답하는 모양새가 됐다. 의대 교수들이 사직서를 내든, 개원의가 파업을 하든, 결국엔 전공의들이 돌아와야 사태가 해결될 수 있기 때문에, 의료계 안팎에선 윤 대통령과 전공의 대표의 만남이 예상보다 빠른 시일 내에 성사될 수 있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윤 대통령은 연일 전향적 메시지를 발신하고 있다. 전날에는 대국민 담화를 통해 “의료계가 확실한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통일된 방안을 가져온다면 얼마든지 논의할 수 있다”고 공언하고, 성태윤 대통령실 정책실장이 방송 인터뷰에서 “2,000명 숫자는 절대적 수치는 아니다”라는 ‘해설’을 보태면서 ‘증원 규모 재논의’ 여지를 열어 놨다. 최근에는 의정 대화를 위해 전공의들에 대한 면허정지 행정처분도 일시 보류했다.

정부의 잇단 양보로 공이 의사들에게로 넘어온 만큼 의사들도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이 커지고 있다. 대한민국시도지사협의회 회장인 박형준 부산시장은 “국민의 생명권과 안전이 우선이고 공적인 선의를 가지고 임해야 하는 것은 정부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고 의료계에도 마땅히 적용되는 말”이라며 의료계에 전향적 자세를 촉구했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도 “최고 지성인 집단답게 지혜를 모아 대안을 제시하고 불안해하고 있는 국민과 환자의 생명을 지켜주는 인도주의 정신을 보여주기를 바란다”고 호소했다.

"의사도 화답해야" 여론에도 의사단체 '싸늘'

다만 대다수 의사단체들은 아직 싸늘하다.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장 당선인은 이날 한국일보와 통화에서 “‘공식 입장 없음’이 공식 입장”이라며 “어제 입장과 변함없다”고 잘라 말했다. 서울대 의대 교수 비대위 관계자도 “대통령 말이 다르고 보좌진 말이 다르니, 실제 정책 기조가 바뀐 건지 의문”이라고 비판했다.

의료계가 합리적 대안 모색에 나설 가능성도 높지는 않다. 의사들은 의대 증원이 철회돼야만 대안을 논의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설사 의료계가 머리를 맞댄다 해도 증원 찬반 여부부터 적정 증원 규모에 이르기까지 의제별로 의사단체들 간 입장 차이가 커서 통일된 협상안을 도출해 내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

서울대 의대 비대위 관계자는 “필수의료 강화대책을 먼저 시행한 후 개선된 의료 지표를 기준으로 의사 수를 추계하자고 이미 정부에 제안했는데 다른 대안이 더 필요하냐”며 “대안을 협의하려면 현재 정부 정책이 중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의협은 증원 철회를 넘어 정원 감축까지 요구하고 있다. 임현택 의협회장 당선인은 “왜 의사들이 대안을 가져와야 하냐”고 반문하면서 “의대 정원을 500~1,000명 줄여야 한다는 입장 또한 변함없다”고 강조했다.

인턴 임용 포기에 의료체계 장기적 타격

전공의 이탈이 7주 차에 접어들면서 의료체계는 점점 흔들리고 있다. 올해 신규 인턴 3,068명 가운데 상당수가 수련환경평가위원회 임용 등록 시한인 이날까지 등록하지 않았다. 앞서 보건복지부가 지난달 29일 주요 100개 수련병원에서 실시한 서면 점검에선 2,697명이 인턴 계약을 포기한 것으로 파악됐다. 전체 인원 대비 90% 규모다. 다만 마감 직전에 등록하는 사례도 있어 수치는 변동될 가능성이 있다.

인턴이 새로 들어오지 않으면 그해 인턴 인력 수급 문제를 넘어 이듬해 레지던트 인력 수급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결과적으로 전문의 배출도 1년 이상 지연될 수밖에 없다. 의료체계에 장기적 타격이 불가피하다. 전병왕 중앙사고수습본부 총괄관(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이날 중수본 브리핑에서 “이번에 인턴 임용을 포기하면 규정상 올해 9월이나 내년 3월이 돼야 수련을 시작할 수 있다”며 “5월에 복귀하더라도 다음 해 4월까지 수련받아야 해 3월에 레지던트 계약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기 때문에 하루빨리 복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김표향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