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아들(아이들)은 성냥 그릴 줄(켤 줄)도 모를 낀데.”
손윤동(65)씨가 두툼한 손으로 ‘향로’라고 적힌 성냥갑에서 성냥을 꺼내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마찰면에 그었다. ‘치익’ 소리와 함께 불꽃이 피면서 유황 냄새가 코 끝으로 전해졌다. 그는 “아침에 출근하면 잘 되나 안 되나 늘 스무 개 정도 그려보곤 했는데…”라며 눈을 감았다.
손씨는 국내 마지막 성냥공장인 ‘의성 성광성냥공장’ 노동자였다. 1954년 2월 경북 의성군 의성읍 도동리에 문을 연 성냥공장은 한때 170명 안팎의 사람들이 일하며 하루 1만5,000갑(한 갑 55개비 기준)을 생산했다. 그러나 일회용 라이터 보급 등으로 성냥 수요가 줄며 전국 성냥공장이 다 문을 닫았고, 마지막까지 버티던 이곳도 2013년 말 무기한 휴업에 들어갔다. 버려진 채 적막하던 공장에 다시 활기가 돈 건 3년 전, 문화체육관광부의 유휴공간 문화재생사업 공모에 선정되면서다. 산업시설 등으로 활용되다가 기능을 잃은 공장 등을 지방자치단체가 매입 후 리모델링해 문화커뮤니티 공간으로 변모시키는 사업이다. 이후 2022년 의성성냥공장 문화재생사업추진단이 출범해 공장 노동자와 주민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고, 공장 터 일부를 ‘전시 체험 시설(팩토리 뮤지엄)’로 탈바꿈하는 일을 하고 있다. 일부 설비를 재가동하기 위한 보수 작업에는 손씨를 비롯해 김문주(64), 김봉수(56)씨 등 과거 공장 노동자들이 직접 참여하고 있다.
의성성냥공장은 제조시설이 거의 없던 시골 마을에서 당당히 지역경제의 한 축을 차지했다. 김문주씨는 “여성들에겐 겨울에는 밤색, 여름엔 푸른색 작업복이 지급됐는데 작업복을 입으면 인근 가게에서 믿고 외상을 해줄 정도였다”고 미소 지었다.
이곳 성냥은 습기에 강했다. 주요 수요처가 경상도, 강원도 등 동해안 지역이라는 점을 고려해 연통에서 나오는 그을음을 섞어 만든 게 비법이었다. 그래서 일반 성냥과 달리 끝에 칠해진 두약(발화제)이 검은색이다. 손씨는 “전국에서 의성 성냥을 최고로 쳐줬다”고 자부심을 드러냈다. 김봉수씨는 “일반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는 담배 성냥뿐 아니라 광고 성냥(판촉용) 주문도 물밀듯 밀려 들어왔다”고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부터 주문량이 뚝 떨어졌다. ‘불티나’라 불리던 일회용 라이터가 보급되면서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공장 노동자도 170명에서 100명, 50명, 마지막엔 30명까지 줄었다. 2013년 9월 30일, 기계가 작동을 멈춘 마지막 날짜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김문주씨는 “20년 넘는 세월을 몸담았던 공장이 문을 닫는다니 굉장히 섭섭했다”고 했다. 손씨도 “군대 제대하고 입사해 24년 4개월을 일한 곳이라 공장을 그만둔 뒤에도 늘 미련이 남더라”고 회상했다.
성냥 제조 공정은 벌목 및 축목-건조-선별-두약-포장의 과정을 거친다. 이 가운데 나무에 화약 약품을 찍어내는 ‘두약’이 핵심인데 재생사업단은 일반인들도 관람할 수 있도록 이 공정을 재현하려 한다. 그러려면 10년 가까이 방치된 윤전기를 다시 돌려야 한다. 손씨 등은 얼마 전부터 매일 800톤짜리 윤전기와 씨름하고 있다. 윤전기를 일일이 분해하고 부품에 묻은 기름때를 하나하나 닦아내 갈아 끼우느라 여념이 없다. 손씨는 “내 청춘을 바친 곳이 (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난다니 감회가 남다르다”고 기대를 나타냈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건 재생사업단에 정소현(30), 남효안(28), 원현희(24)씨 20대 청년 3명이 몸담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냥은 “1년에 한 번 생일 케이크 초에 불을 붙일 때나 봤던 물건”이라고 말하는 이른바 ‘MZ세대’들이 성냥의 부활을 이끌고 있는 셈. 3명 중 의성이 고향인 원씨를 뺀 정씨와 남씨는 재생사업을 위해 부산에서 이곳으로 이사와 정착했다. 정씨는 “아카이브 작업을 위해 이곳에서 일했던 어르신들을 심층 인터뷰하며 이들에게 공장이 얼마나 소중한 공간이었는지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재생사업단은 이곳을 지역 주민들도 적극 참여하는 관광거점으로 키워 소멸 위기를 맞고 있는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계획이다. 옛 노동자들이 직접 해설사로 활동하거나 성냥을 주제로 한 굿즈(물품) 제작, 인근 청년 창업자들과의 협업, 공장 터 주변의 빈 집들을 숙박업소로 활용하는 방안 등이 논의되고 있다. 이정희 재생사업단장은 “단순히 외지인들이 관광 목적으로 잠깐 들러보고 가는 게 아닌 주민들과 다함께 문화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시설로 만드는 게 목표”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