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에는 작가가 설 자리가 어느 곳에도 없다는 것을 이번 기회에 확실히 알게 됐습니다. 저는 곧 이 나라를 떠나기로 했습니다."
한국 실험미술의 선구자인 김구림(88) 작가가 28일 서울 평창동 작업실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이같이 말했다. 국립현대미술관(국현)과 갈등을 빚고 있는 그는 올해 중 국내 작업 공간을 모두 정리한 뒤 미국 뉴욕으로 기반을 옮기겠다고 말했다.
갈등의 중심에는 지난해 8월부터 지난달까지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된 회고전 '김구림'의 도록이 있다. 국현이 제작한 도록에 실린 도판 상태가 원작을 훼손하는 수준이라는 게 김 작가의 주장이다. 그는 전시 도록에 실린 논고의 필진으로 현대미술과 김 작가의 작품세계를 잘 모르는 인사를 국현이 섭외해 김 작가가 직접 필진을 구해야 했다고도 주장했다. 전시 출품작에 비해 도록에 실린 작품 수가 적은 것도 문제 삼았다.
김 작가는 "(도판 배경으로) 검은 바탕을 써서 실제 작품과 완전히 다른 작품으로 만들어 놓았다"며 "100점 이상의 수록 작품이 이런 식으로 인쇄돼 있다"고 말했다. 김 작가는 도록 제작 과정에서 국현 측으로부터 교정지를 받아보았지만, 흑백 인쇄물이어서 색 수정 의견을 낼 수 없었다고도 했다.
국현은 김 작가의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는 입장이다. 국현 관계자는 "도록 제작 과정에서 내용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인쇄 전에 컬러 교정지가 세 차례 오가며 김 작가가 직접 수정했고 최종 인쇄본 역시 작가측에 공유됐다"며 "수록 작품과 편집, 필진 선정 등 도록에 관한 모든 부분은 사전에 조율된 내용"이라고 밝혔다.
김 작가는 미국으로 떠나기 전 평창동 작업실을 미술관으로 건립하는 계획도 백지화할 방침이다. 그는 서울 종로구청 등과 미술관 건립을 추진하며 작품 500여 점을 미술관 소장품으로 기증하겠다는 계획도 모두 취소할 것이라 덧붙였다.
2017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은 김 작가는 장르에 구애받지 않는 전위적 작품 활동으로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을 개척한 선구자로 꼽힌다. 1985년 미국으로 떠나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과 2인전을 여는 등 해외에서 명성을 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