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약품그룹과 OCI그룹 간 통합 추진이 76일 만에 무산됐다. 경영권 갈등의 분수령인 주주총회 표 대결에서 통합에 반대하는 창업주의 장·차남인 임종윤·종훈 형제 측이 완승을 거뒀기 때문이다. 주총 결과가 나온 직후 OCI홀딩스도 곧바로 통합 중단을 선언했다. 장·차남이 나란히 경영 일선 복귀를 선언한 가운데, 한미약품은 쪼개진 그룹 재정비와 사업 계획 재편 등으로 한동안 혼란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28일 한미약품그룹의 지주사인 한미사이언스는 경기 화성시 수원과학대학 신텍스(SINTEX)에서 정기 주주총회를 열고 창업주의 장·차남 측 이사진 5명을 전원 선임하기로 의결했다. 앞서 한미약품그룹은 창업주의 아내인 송영숙 한미약품 회장과 장녀인 임주현 한미약품 부회장이 주도해 지난 1월 OCI그룹과 통합을 추진했지만, 장·차남이 반대하며 경영권 분쟁이 발발했다.
투표 결과는 박빙이었다. 당초 우호지분을 포함하면 모녀 측이 약 43%, 장·차남 측이 40.57%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고, 지분율 차이가 크지 않은 만큼 결국 나머지 지분을 가진 소액주주가 결과를 판가름했다. 출석 의결권 수 기준으로 임종윤·종훈 형제는 각각 51.2%, 51.8%를 얻어 이사회에 진입했다. 이로써 한미사이언스 이사진 9명 가운데 형제 측 인사가 권규찬 디엑스앤브이엑스 대표이사, 배보경 고려대 경영대 교수, 사봉관 변호사를 포함한 5명으로 과반을 차지하게 됐다. 반면 임 부회장과 이우현 OCI홀딩스 회장은 각각 48%에 머물러 이사에 선임되지 못했다.
주총 현장에서는 최종 결과를 내기까지 진통이 이어졌다. 당초 오전 9시에 개회 예정이었지만, 의결권 위임장 집계가 늦어지면서 3시간이 지나 시작됐다. 투표 후 검표만도 2시간 이상 소요되며 주주들 사이에서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 장·차남 측의 완승이 알려지자 OCI홀딩스는 즉각 "주주분들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통합 절차는 중단된다. 앞으로 한미약품그룹의 발전을 바라겠다"며 진행 중이던 통합 무산을 공표했다.
주총 직후 임종윤 이사는 "더 이상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어머니와 여동생이 실망할 수 있는데, 저는 같이 가길 원한다"고 화합을 제안했다. 이어 "소액주주가 아닌 모두 똑같은 주주이며, 한미 창업부터 키맨이셨을 신동국 한양정밀 회장에게 감사한다"고 덧붙였다.
통합 무산을 넘어 갑작스러운 경영권 교체까지 앞둔 한미약품은 당분간 혼란을 수습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관측이 나온다. 형제 측이 이사회 과반은 얻었지만 창업주 일가가 둘로 쪼개진 만큼 임시주총, 법적 분쟁 등 남은 과제가 산적해 있다. 이날 주총 종료 때까지 송 회장과 임 부회장은 모두 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모녀 측은 입장문을 통해 "많은 관심을 보여주신 주주들과 전·현직 한미그룹 임직원들께도 감사하다. 앞으로도 한미에 대한 성원 부탁드린다"고만 밝혔다.
2010년대 중반 기존 약을 개량해 신약을 만드는 기술로 세계 시장에 한국 제약사의 이름을 알리며 업계 선두주자로 올라선 한미약품은 2020년 창업주 임성기 회장의 별세 전후 흔들리기 시작했다. 글로벌 제약사와의 기술수출 계약이 잇따라 해지된 데다, 후계 구도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상속세 해법을 둘러싸고 가족 갈등까지 불거졌다. 중국에서 디엑스앤브이엑스와 코리그룹을 설립하며 독자노선을 걸어온 장남과 그룹 내에서 입지를 다져온 장녀가 각각 모친, 차남과 손을 잡으며 지금의 분쟁 구도가 형성됐다. 모녀가 OCI와 통합을 추진하면서 형제와의 갈등이 극단으로 치달았고, 주총 전까지 양측은 경영권을 두고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다.
형제는 주총에 앞서 지난 21일 "5년 안에 시가총액 50조 원, 순이익 1조 원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아울러 바이오의약품 위탁개발(CDO)을 하는 글로벌 제약사 론자를 언급하며 "한국의 론자가 되겠다"는 비전도 발표했다. 하지만 화학의약품 중심의 연구개발(R&D)을 해온 한미약품이 그간의 전략을 단기간에 변화·확장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 업계엔 우려 섞인 시선이 여전하다. 이에 대해 임종윤 이사는 "기존 신약 개발 파이프라인(후보물질)은 확대하면서, CDO 사업을 병행 추진할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