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기다리는 3월의 시간은 참 더디게 흐른다. 경칩, 춘분 다 지내고 마음은 이미 봄의 한가운데를 거니는데 주변에선 좀처럼 봄 빛깔을 찾기 어렵다. 북상하던 꽃 소식은 변덕스러운 꽃샘추위에 주춤거리고, 개화가 빠를 거라는 예보에 축제를 앞당겼던 지역은 주인공 없이 잔치를 여는 낭패를 겪었다. 그럼에도 계절은 어김이 없어 경기도 산골짜기에도 꽃은 피고 축제가 열렸다.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이웃한 이천 백사면과 양평 개군면의 산수유마을은 지난 주말 봄꽃 축제를 마무리했다. 잔치는 끝났지만 망울을 터트린 꽃송이는 이번 주말까지 화사한 빛깔을 뽐낼 것으로 예상된다.
마을에 닿기도 전에 노란 꽃물결이다. 이천시 신둔면에서 백사면 산수유마을로 가는 왕복 2차선 도로엔 산수유가 가로수로 심겨 있다. 아직 어린나무라 풍성하지 못하지만 햇살을 받은 꽃송이가 보석처럼 반짝거린다. 마을이 가까워지면 노란 꽃물결은 점점 진해진다. 차례로 경사리, 도립리, 송말리를 거치는데 그중에서도 도립리가 중심이다. 이맘때면 상설 주차장으로 모자라 도로 건너편에 임시 주차장까지 마련한다.
산책로는 주차장에서 도립리 마을을 거쳐 원적산 자락으로 연결된다. 아쉬움이 남는다면 원적산(564m) 정상까지 등산을 해도 되고, 마을 길을 따라 경사리와 송말리까지 걸어도 좋다.
도립리 마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영축사라는 작은 사찰이 보인다. 마을 어귀 평지에 자리 잡은 사찰이라 산문이 따로 없고 새 건물인 듯 깔끔한 대웅전과 마당의 9층 석탑이 돋보인다. 2년 전 지진으로 무너진 미얀마의 어느 절에서 수습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해 석탑을 세웠다는 설명으로 보아 아직 역사를 만들어 가는 사찰로 보인다.
마을 안에는 커다란 느티나무 몇 그루가 호위하는 ‘육괴정’이라는 한옥이 중심을 잡고 있다. 정자는 조선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 때 난을 피해 낙향한 엄용순이 세웠다. 처음에 초당으로 지었는데 후대에 여러 차례 중건을 거쳐 팔작지붕 본당과 이를 둘러싼 담장과 대문까지 설치했다. 겉모습은 정자가 아닌 사당의 형태다.
엄용순은 정자를 세우고 당대의 선비였던 김안국, 강은, 오경, 임내신, 성담령 다섯 벗과 함께 연못 주변에 각자 한 그루씩 느티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육괴(六槐)는 바로 여섯 그루 느티나무를 의미한다. 정자 앞과 좌측에 뿌리내린 두 그루가 오랜 세월 그들의 우정을 기리고 있다.
산수유도 이들이 심기 시작했다고 전해져 마을에선 일명 ‘선비꽃’으로 불린다. 일부 옛 담장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마을 골목을 지나면 뒤편 언덕에 시춘목(始春木)과 이를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봄에는 선비의 상징인 노란 꽃, 여름에는 향기 나는 잎, 가을에는 자수정 같은 열매, 겨울에는 마디마디 아름다운 눈꽃 나무’. 뻔한 문구지만 화사한 봄 풍경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주민들에게 쏠쏠하게 돈벌이를 안기는 나무와 그 나무를 심은 선현들에 대한 고마움이 새겨져 있다.
경사리와 송말리까지 세 마을을 합하면 어린 묘목에서부터 수령 500년에 이르는 것까지 1만7,000여 그루의 산수유가 심겨 있고, 159개 농가에서 연간 약 2만 ㎏의 열매를 생산하고 있으니 효자 나무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마을 뒤편 산자락으로 난 길을 따라 걸으면 본격적으로 산수유 군락이다. 층층이 계단밭이 이제는 나들이객을 위한 공원으로 꾸며졌다. 샛노란 꽃송이가 구슬처럼 다닥다닥 붙어 노란 꽃그늘을 드리우고, 군데군데 삼각지붕 오두막 쉼터와 벤치가 놓여 있다. 꼭대기에는 커다란 그네를 설치해 놓았는데, 방향이 꽃 군락이 아니라 조금 생뚱맞다.
이 정도면 반나절 꽃 나들이로 모자람이 없지만 아쉬움이 남는다면 계곡 1㎞ 상류의 낙수제 폭포까지 가볍게 산책할 수 있다. 돌부리처럼 거친 바위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사실 폭포라 이름하기엔 수량도 경관도 모자라지만 짧은 구간 숲 산책을 즐길 수 있다. 폭포에서 뒤돌아서면 노란 산수유 가지 사이로 너른 들판과 이천 시내 풍경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폭포에서 원적산 정상까지는 본격적인 등산로다. 산등성이까지 올랐다가 다음 계곡으로 하산하면 이천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 영원사로 연결된다. 사적기에 의하면 신라 선덕여왕 7년(638)에 창건하고 고려 문종 22년(1068)에 중창했는데, 이때 심은 은행나무가 지금까지 살아남아 보호수로 지정돼 있다. 사실 대웅전, 산신각, 요사채 등 남아 있는 전각에서는 고찰의 풍모를 느끼기 어려워 이 은행나무가 절의 산증인이나 마찬가지다.
대웅전 아래에는 특이한 모양의 불상이 하나 세워져 있다. 일반적인 석불에 비해 몸체가 지나치게 호리호리하다. 부러진 허리 부분을 이어 붙인 흔적이 또렷해 미적 감각을 논할 수준은 아니지만 그만큼 소탈하고 친근감이 느껴진다. 원래 이곳에 있던 불상이 아니라 이천 갈산동의 폐사지에서 이전해 복원했다고 한다.
인근의 반룡송(蟠龍松)도 천연기념물로 보호받고 있다. 도로변 주차장에 차를 대고 들길을 따라 조금 들어가면 평평한 들판에 몸을 바짝 붙여 옆으로 넓게 퍼진 소나무 두 그루가 보인다. 용의 기운이 서린 소나무라는 이름처럼 지상 2m에서 사방으로 가지를 펼치고 있는데, 서로 꼬이고 휘며 자란 가지가 볼수록 기묘하다. 안내판에는 ‘신라 말기 승려 도선이 장차 난세를 구할 큰 인물이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심은 소나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수령 500년으로 추측된다는 설명과 상충된다.
이천 산수유마을과 양평 산수유마을은 약 18㎞ 떨어져 있다. 그 사이 여주 땅을 거치고 남한강을 가로지른다. 금사면에서 이포대교를 지나 대신면에 접어들면 한층 넓어진 강줄기 바로 옆 산등성이에 파사성이 있다. 해발 230m 산 정상과 계곡을 감싸는 형태로 쌓은 둘레 936m 산성이다.
명칭에 신라 제5대 파사이사금(80∼112년 재위)이 들어 있어 당시에 쌓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신빙성이 떨어진다. 지금까지 발굴 조사 결과로는 성벽의 축성 방식과 구조, 성돌을 다듬은 방법 등으로 미루어 6세기 중엽 이후 한강 유역으로 진출한 신라가 처음 쌓았고, 임진왜란 때 보수를 거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파사성은 문헌상 조선 중기의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산성(故山城)'이라는 명칭으로 처음 등장한 이후 17~19세기 각종 지리지에 빠짐없이 기록돼 있다고 한다. 1999년부터 2018년까지 모두 여덟 차례 발굴조사를 실시했는데, 성벽의 최고 높이는 약 6.5m, 상단 폭은 최대 7.2m에 이른다.
파사성은 높지 않지만 주변에 큰 산이 없어 정상에 오르면 양평과 여주 일대가 훤하게 내려다보인다. 남한강 물길로 침입하는 외적을 감시하고 견제하기 위한 최적의 입지 조건이다. 강 맞은편에 현재는 터만 남은 이포나루가 있다. 충주에서 여주, 양평을 거쳐 서울로 이어지는 남한강 수운의 요지였으니 군사와 물류의 동향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성이다.
도로변 주차장에서 산성까지 거리는 약 1㎞, 멀지 않지만 아주 가파른 길이어서 넉넉하게 30분은 잡아야 한다. 대신 탐방로는 차가 다닐 정도로 넓고 가지런해 걷기에 불편함은 없다. 거친 숨을 몰아쉬고 정상 바로 아래에서 고개를 들면 남문 터다. 보수 공사 중인 현장을 돌면 바로 성벽길로 이어진다. 성벽 구간은 오히려 경사가 완만해 편하게 오를 수 있는데, 중턱쯤부터 이미 전망이 시원하다. 성벽이 일직선으로 내리뻗은 산등성이 좌측에 이포보가 보이고, 오른편으로는 도도하게 휘어진 물줄기 옆으로 양평 개군면 들판과 마을이 평온하고 넉넉하다. 걷는 수고에 비해 호젓하면서도 웅장하게 한강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산성 입구 주차장에서 연결된 강변 산책로는 이포보와 상류 당남리섬으로 이어진다. 당남리섬에는 약 2㎞ 산책로가 깔끔하게 정비돼 있다. 섬 전체가 경관농업지구여서 곧 화사한 봄꽃을 즐길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매년 4월이면 대규모 유채밭이 펼쳐지는데, 지난해 홍수로 가장자리 일부가 자갈 바닥을 드러내 올해는 예년만큼 풍성하지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
양평 산수유마을은 이곳에서 약 6㎞ 떨어져 있다. 이천보다 군락은 작지만 산자락에 자리 잡은 내리마을 담장과 정겹게 어우러져 있다. 밭두렁과 길가에 노랗게 피어있는 산수화를 따라 걸으면 추읍산(583m) 등산로와 연결된다. 큰 항아리를 엎어 놓은 것처럼 부드럽고 둥그스름한 산이다. 정상에 오르면 7개 읍내가 두루 조망된다고 해 마을에서는 칠읍산이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