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다르게 꽃들이 피어납니다. 산수유가 시작이었는데 매화꽃이 이어지고, 밤새 백목련이 꽃봉오리를 터트렸네요. 조만간 명자꽃도 뒤를 이를 듯싶습니다. 일 년 중 시시각각 꽃시계가 가장 빨리 돌아가고, 매일매일 바뀌는 꽃달력이 가장 빨리 넘어가는 시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식물학의 체계를 만든, 칼 폰 린네는 때가 되면 규칙적으로 피어나는 꽃들을 관찰하며 그가 일했던 스웨덴 웁살라대학의 정원에 꽃시계 꽃밭을 만들고자 했답니다. 예를 들면 민들레 꽃이 피면 9시, 금잔화 꽃이 피면 10시를 알 수 있도록 말이지요. 물론 성공적이진 않았습니다. 같은 식물도 위도나 고도에 따라, 온도나 습도에 따라 달라서입니다.
꽃달력은 꽃시계보다는 조금 더 낫지만 여전히 완벽하게 개화를 예측하긴 어렵습니다. 지난해에는 너무 일찍 피어, 올해는 아직 꽃봉오리가 펴지지 않아 울상인 전국의 벚꽃 축제만 보아도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짐작이 가시지요? 꽃눈을 분화시키는 데에는 밤낮의 길이가 중요하지만, 그다음부터는 기온에 따라 속도가 조정되고, 기후위기는 너무도 급진적으로 우리 곁에 다가와 자연의 변화를 예측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워졌습니다.
저도 저만의 꽃달력이 있었습니다. 평생 연구대상이 되는 수많은 식물들을 찾아다니다 보니 지금쯤 이 땅의 어디에서 어떤 꽃들이 피고 지고 있음이 머리와 마음에 속속들이 각인돼 때가 되면 절로 들썩들썩합니다. 연구자에서 수목원장이 되면서 저의 꽃달력에는 변화가 생겼는데, 이듬해 봄에 꽃을 보기 위해 구근을 심어둬야 할 때, 꽃을 풍성히 하고 아름다운 나무 모양을 위해 가지를 쳐주어야 할 때 등등 수목원의 식물관리에 필요한 때를 기억하는 일정이 추가됐습니다.
요즈음은 새로운 꽃달력을 만들고 있습니다. 조사, 연구 등등 무엇인가를 하기 위한 꽃나들이가 아니라 오래 살아온 나무 한 그루라도 제대로 만나 온전하게 사유하고 평화롭게 위로받을 수 있는 길을 떠나고자 계획하는 꽃달력이지요.
매화의 향기는 바늘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만큼 섬세한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는 이야기에 빠져, 이른 아침, 아무도 없는 선암사 매화구경을 원 없이 한 후론 매년 봄이면 매화 앓이를 합니다.
몇 년을 벼르고 있던 화엄사 홍매구경은 벌써 놓쳤습니다. 4월엔 덕수궁 석어당의 살구나무, 5월엔 화계에 얹은 작약, 6월에는 가장 크게 자란 반론산 철쭉꽃에 도전하고, 7월이면 강원 강릉 방동리의 무궁화, 8월이면 병산서원 만대루에 앉아 붉은 배롱나무꽃을 만나고 싶습니다.
꽃이 지면 또 어떻습니까! 9월이면 충남 부여 가림성의 느티나무에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10월이면 그 많은 단풍나무 중 가장 큰 내장산의 단풍나무 품 안에 서 보고, 11월이 오면 번번이 때를 놓친 반계리 은행나무 노란빛 아래에서 세월을 만나고 싶습니다. 겨울이 오고 가면 동백 꽃송이가 눈물처럼 후드득 지는 그날까지 그렇게 꽃달력을 채워보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꽃달력도 궁금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