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심장부를 뒤흔든 ‘모스크바 공연장 테러 사건’이 최근 5선을 확정한 ‘스트롱맨’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책임론으로 번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나 서방과의 대결, 국내 비판 세력 색출에만 몰두하느라 자국민을 테러리즘의 위협에 무방비로 노출시켰고, 결국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낳은 초대형 공공안전 참사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테러 배후를 자처한 이슬람국가(IS)가 공개한 공격 현장 영상과 범인 4명에 대한 러시아 당국의 고문 의혹도 '푸틴 리더십'을 흔드는 변수가 되고 있다.
24일(현지시간) 영국 가디언과 미국 워싱턴포스트(WP) 등에 따르면 지난 22일 저녁 모스크바 북서부 크라스노고르스크의 크로커스 시티홀 공연장에서 벌어진 총격 방화 테러 사건 희생자는 이날 오후까지 137명으로 늘었다. 모스크바 보건 당국은 부상자가 180명 이상이라고 밝혔다. 가디언은 “러시아 정부는 사망자가 대부분 총상 또는 화재에 따른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숨졌으며, (부상자 중) 최소 12명이 더 목숨을 잃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푸틴 전시 체제의 취약성이 드러났다’는 평가를 쏟아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고위 간부를 지낸 더글러스 런던 조지타운대 부교수는 WP에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인이 다수 포함된 IS의 위협을 우선순위에 두지 않았다”며 “푸틴이 자국 내 정적 추적, 우크라이나 침공 등에 집중한 탓에 (러시아가) 중앙아시아발(發) 잠재적 테러 위협의 사각지대가 됐다”고 말했다.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이 대테러 임무보다는 ‘반(反)푸틴·친(親)우크라이나’ 인사 추적에 더 힘을 쏟는 바람에 IS의 공격을 놓쳤다는 얘기다.
러시아 내에서도 비슷한 지적이 나온다. 미국의 사전 경고를 묵살한 데다 ‘우크라이나 배후설’만 주장하는 푸틴 정권의 대응은 틀렸다는 비판이다. 정치 분석가 미하일 비노그라도프는 러시아 RBK TV에서 “우크라이나가 테러로 무엇을 얻을지 분명치 않다”며 “법은 정권 비판 인사들에게 우선 집행됐고, ‘테러’는 러시아 당국에 대한 비판으로만 정의됐다”고 지적했다. 과거 푸틴 대통령의 연설문 작성자였던 압바스 갈랴모프도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에 “푸틴이 평화와 안정을 가져오겠다는 약속을 못 지킨 것”이라며 “정말 IS가 배후라면 모든 외교 정책이 쓸모없어지는 것이어서 우크라이나 비난에 애를 쓰는 것”이라고 말했다.
파문은 확산되고 있다. IS는 이날 자체 선전매체인 아마크통신을 통해 공격 당시 모습을 담은 90초 분량 영상을 공개했다. ‘독점 영상: 기독교인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공격’이라는 제목의 이 영상에는 한 용의자가 많은 시신이 쓰러져 있는 공연장 복도에 돌격 소총을 쏘는 모습, “자비 없이 죽여라. 우리는 신의 대의를 위해 왔다”는 변조 처리 음성과 자막 등이 나온다.
범인들에 대한 고문 정황도 충격을 주고 있다. 이날 러시아 법원은 타지키스탄 국적 피의자(19~32세) 4명에게 일단 ‘2개월간 구금 명령’을 내리며 이들의 출석 모습을 담은 영상과 사진을 언론에 배포했다.
문제는 모두 고문과 구타를 당한 게 확실할 정도로 얼굴에 멍과 상처가 가득했다는 점이다. 특히 사이다크라미 라차발리조다(30)는 귀에 커다란 붕대를 감고 있었는데, 영국 BBC방송은 “러시아 당국에서 심문을 받는 동안 귀가 잘린 것으로 알려졌다”고 전했다.
실제 러시아 친정부 성향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전기충격기와 망치 등으로 이들을 고문하는 영상도 게시됐다. 러시아 인권단체 ‘굴라구 넷’은 “푸틴과 당국에 유리한 증언(우크라 배후설 입증)을 받아내려 푸틴이 고문을 지시한 게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범인 4명 중 3명은 법정에서 범행을 시인했으며, 유죄 판결 시 최대 종신형을 선고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푸틴 정권의 실제 위기로까지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WP는 “러시아에선 푸틴에게 도전하는 이들이 거의 없어 그가 미국의 경고를 더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대가를 치를 가능성은 희박하다”며 “푸틴이 우크라이나와 서방 비난을 계속 이어갈 공산이 크고, (국내 정적에 대한) 추가 탄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게 분석가들의 대체적 견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