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 동방신기·JYJ 출신의 김재중과 배우 진세연이 출연한 로맨스 드라마 ‘나쁜 기억 지우개’는 2022년 초 촬영을 마쳤지만 2년째 편성을 기다리는 중이다. 한류스타 김재중이 오랜만에 출연한 작품이라 곧바로 일본에 판매될 만큼 관심을 모았지만 국내 플랫폼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톱스타 송중기가 주연한 영화 ‘보고타’, 차인표 주연의 10부작 시트콤 '청와대 사람들'도 2021년 촬영을 마쳤으나 관객과 만나지 못했다.
방송국이나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의 선택을 받지 못하는 드라마가 늘면서 촬영을 마치고도 스태프들이 임금을 받지 못하는 사례도 늘었다. 홍태화 영화인신문고 사무국장은 “지난해 접수된 드라마 제작 스태프의 임금체불 피해 건수는 192건으로 연간 평균치인 72건의 2.6배 수준”이라며 “올해도 2월까지만 31건이 접수됐다”고 말했다. 홍 국장은 “2022년엔 OTT 공개를 목표로 제작된 드라마 관련 피해는 한 건도 없었는데 지난해 76건으로 늘었다”고 덧붙였다.
영화 ‘기생충’과 드라마 ‘오징어게임’의 세계적인 인기로 승승장구하던 한국 드라마와 영화에 빙하기가 찾아왔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영화 제작이 위축되고 OTT 시장이 커지자 영화·드라마 제작사들이 우후죽순 드라마 기획에 뛰어들며 ‘K콘텐츠의 전성기'를 이루는 듯했으나, 거품이 꺼지면서 창고에 쌓이는 작품이 늘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촬영을 마치고도 영화관이나 OTT 등 출구를 찾지 못한 영화는 100여 편에 이른다. 개봉이 밀리며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하는 작품이 증가하면서 신규 투자가 얼어붙었다. 재능 있는 신인 감독과 배우의 데뷔 통로였던 저예산·독립영화도 정부 지원금 삭감으로 제작이 크게 줄어들 전망이다.
드라마 업계는 방송사와 OTT의 재정 긴축으로 얼어붙었다. 넷플릭스 등 OTT가 대중화하기 전엔 지상파, 케이블, 종편을 통해 주간 편성작이 30편이 넘었지만 지금은 13편으로 쪼그라들었다. 일일드라마 3편을 제외하면 평일(월~목요일) 드라마는 3편(KBS2, tvN, ENA)뿐이다. 종편채널인 TV조선과 MBN은 방송 중인 드라마가 없다. 토종 OTT 업체들은 드라마 투자·제작을 중단하거나 대폭 축소했고, 웹드라마를 제작하던 네이버와 카카오도 투자를 줄여가고 있다.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에 따르면 국내 연간 편성 드라마는 2022년 141편에서 지난해 123편으로 줄었고 올해는 100여 편에 머무를 전망이다. 2년 사이 30% 가까이 줄어든 것이다. 방송사의 광고 매출 하락과 드라마 제작비 증가가 맞물리면서다. 배대식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 사무총장은 “협회에서 파악한 미편성 드라마는 27편 안팎”이라며 "방송사 예산은 정해져 있는데 제작비가 너무 올라 편성 수를 줄이면서 생긴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업계에선 군소 제작사의 작품까지 포함하면 미편성 드라마가 최소 30편이 넘을 것으로 본다. 한 지상파 방송사 관계자는 “드라마 수요보다 공급이 많아지니 제작비를 덜 받더라도 편성만 해달라는 제작사의 제의가 많아졌다”고 말했다.
제작비 급증의 가장 큰 요인으론 배우의 출연료 인상이 꼽힌다. 글로벌 OTT의 국내 진입으로 톱스타의 출연료가 크게 뛰었다. ‘오징어 게임 2’ 주연 이정재의 출연료는 회당 10억 원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고, 주요 A급 주연배우들의 출연료도 3, 4년 전 1억~ 2억 원 수준에서 5억 원 안팎으로 올라갔다. 이에 따라 회당 평균 제작비가 2018년 5억~ 6억 원 수준에서 최근 10억 원 안팎으로 치솟으며 제작사들의 부담이 커졌다. 조연배우들의 출연료 인상, 52시간 근무제로 인한 촬영 회차 증가 등도 제작비 증가의 요인들이다.
제작 편수가 급감하자 배우들도 울상이다. 배우 이동건은 최근 동료 배우 김지석의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전에는 차기작을 고민할 때 두세 편 정도를 놓고 고를 수 있었는데 요즘은 1년에 대본이 두 권 정도 들어온다”고 했고, 한예슬과 오윤아도 개인 유튜브 채널을 통해 하나같이 “출연할 작품이 없다”고 토로했다.
K콘텐츠의 빙하기는 당분간 이어질 것이라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공통적인 관측이다. 익명을 요구한 제작사 관계자는 “뛰어난 창작자들과 배우가 있기에 좋은 작품은 계속 나올 수 있겠지만 드라마와 영화 제작 환경이 더욱 악화하면 중간급에 해당하는 작품들이 줄어든다"며 "또 신인 창작자가 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무너지면서 수십 년간 어렵게 구축한 K콘텐츠의 토대가 흔들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