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지휘자 김은선(44)이 100년 역사의 미국 샌프란시스코 오페라(SFO) 최초의 여성 음악감독으로 내정된 2019년 12월. 현지 매체 샌프란시스코 클래시컬 보이스는 김은선에게 '할 수 있는 지휘자(The can-do conductor)'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어려운 도전 과제도 자신감 있게 대처하는 능력을 갖췄다는 의미다.
최근 김은선의 행보는 이 수식어와 꼭 맞아떨어진다. 뉴욕 필하모닉,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의 데뷔 연주를 호평 속에 마쳤고, 다음 달엔 독일 명문 악단 베를린 필하모닉에 데뷔한다. 한국 지휘자의 베를린 필 객원 지휘는 정명훈에 이은 두 번째. 유럽에 머물고 있는 김은선을 최근 화상으로 만났다. 그는 "누구나 가고 싶은 무대인 만큼 설렘도, 긴장감도 있지만 기대가 가장 크다"며 "부담을 느꼈다면 지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나타냈다.
김은선이 객원 지휘자로 이끄는 다음 달 18~20일 베를린 필 정기연주회 연주 프로그램은 올해 탄생 150주년을 맞은 쇤베르크의 모노드라마 '기대'. 올해 초연 100주년이 된 이 곡을 소프라노 타마라 윌슨과 함께 들려준다. 2부에서 선보일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3번은 오는 7월 서울시향 정기 공연에서도 선보인다.
베를린 필은 창단 100년 만인 1982년에야 여성 단원을 받아들였고, 여성 악장 임명은 지난해가 처음일 정도로 여성에게 문턱이 높다. 여성 지휘자가 무대에 서기는 했지만 아시아 여성인 김은선의 지휘는 매우 이례적이다. 그는 "'여성 지휘자'에 초점을 맞춘 질문을 많이 받지만 사실 남자였던 적이 없어 여성 지휘자로서의 어려움은 잘 모르겠다"고 웃으며 말했다.
한때는 여성 지휘자 관련 질문 받기를 거부했다. 이제는 자신이 여성임을 드러내는 것이 누군가에게 동기 부여가 될 수 있다는 점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김은선은 "'아시아 여성 지휘자'라는 내 존재 자체를 감동으로 받아들이는 과거 세대와 나를 보며 지휘자의 꿈을 키운다는 어린 소녀들을 보면 기쁘다"고 했다. 그러면서 "2012년 100세의 나이로 돌아가신 외할머니는 생전에 '여의사'로 불렸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며 "나 역시 '여성 지휘자'가 아닌 그냥 '지휘자'로 불릴 날이 언젠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연세대 작곡과와 연세대학원 지휘과를 거쳐 독일 슈투트가르트 음대에서 수학한 김은선은 2008년 스페인 헤수스 로페즈 코보스 오페라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이름을 알렸다. 2021년 SFO 음악감독 취임과 함께 '도장깨기'하듯 뉴욕 메트로폴리탄오페라, 이탈리아 라 스칼라 등 유수의 오페라 극장과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까지 성공적 데뷔 무대를 이어가고 있다.
큰 어려움 없이 성공 신화를 써내려가는 듯 보이지만 김은선은 "사실 쉬지 않고 공부한다"고 했다. 그는 한국어를 포함해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 이태리어, 스페인어까지 6개국어를 구사한다. 드보르자크 오페라 '루살카' 지휘를 위해 체코어까지 익혔다. 그는 "음악이 만국 공통어라고 하지만 작곡가의 색채를 이해하려면 말투를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지휘의 가장 큰 매력은 "말 한마디 없이도 지휘봉으로 하나가 되고 음악이 완성되는 점"이다. 김은선은 "무대에서 유일하게 소리를 내지 않는 사람이 지휘자인 만큼 연주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영감을 주는 지휘자가 되고 싶다"고 강조했다.
세계 최정상 악단인 베를린 필에 서게 된 지금, 더 도전하고 싶은 무대가 있는지 궁금했다.
"소속사에서 일정 확인하면서 연주 장소를 묻지 않는 음악가는 제가 처음이라고 해요. 크든 작든 제게는 그 무대가 세상의 중심이거든요. 제가 갈 곳이라면 언젠가 가게 되겠죠. 그래서 제 미션은 최선을 다해 오늘의 음악을 하고 오늘을 행복하게 사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