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의료 시스템에 비가역적인 막대한 손상을 입혀야 한다. 많은 지방 사립 병원을 파산시켜야 한다."
최근 전공의 집단사직으로 촉발된 의정갈등 이후 의사와 의대생만 이용할 수 있는 '익명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이다. 사직 전공의 행동지침부터, 이른바 '배신자'로 낙인찍는 복귀 전공의 명단 공유, 심지어 "의료 시스템을 붕괴시켜야 한다"는 내용까지 발언에 거침이 없다. 익명성에 기댄 그들만의 온라인 공간이 내부 강경 여론을 주도하고 있지만, 경찰 수사 외에는 딱히 제지할 방법이 없어 절충과 타협 가능성마저 차단하고 있다는 비판이 거세다.
서울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는 22일 증거은닉 혐의를 받는 인터넷커뮤니티 '메디스태프'의 최고기술책임자(CTO) A씨를 불러 조사했다. 20일에 이은 추가 소환이다. 메디스태프는 의사·의대생이 의견을 나누는 커뮤니티 플랫폼이다. 익명 게시판인 데다 의사면허증 등으로 인증을 거쳐야 가입이 가능하고 게시글 복사나 화면 캡처도 금지된다. 만약 캡처 등을 시도하면 워터마크가 찍혀 유포자를 쉽게 적발할 수 있다고 한다. 회원끼리 주고받는 메시지 역시 일정 기간이 지나면 자동 삭제되는 등 폐쇄성이 특징이다.
메디스태프는 전공의들에게 사직 전 병원자료를 삭제하라는 내용이 담긴 글이 유포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외부 유출 위험이 적다 보니, 이후 의료계 집단행동 국면에서 정부에 대항하는 구심점으로 자리 잡았다.
문제는 익명성을 무기로 허위 정보를 남발하거나 정부 지침을 따르는 의료인들을 혐오하는 등 극단적 여론을 조장하는 데 있다. 전공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파견된 군의관과 공보의에게 "진료를 거부하라"는 글도, 전공의 복귀를 설득한 일부 대학병원 교수들의 실명·사진을 공개한 게시물도 메디스태프발(發)이다.
경찰이 전공의 지침 최초 유포자를 서울 소재 의사로 특정해 피의자로 입건해도 강경 대응 분위기는 잦아들지 않고 있다. 18일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한 방재승 서울대 의대 교수협의회 비상대책위원장을 향해 '메일 테러'를 하자는 선동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여론을 호도하는 게시물이 공개되는 족족 수사의뢰하고 있지만, 이것 외엔 갈수록 과격해지는 커뮤니티를 관리·감독할 방법이 없는 상황이다. 보건복지부는 '의료체계를 박살 내자'는 취지의 게시글도 전날 경찰청에 수사를 요청했다. 박민수 복지부 차관은 "사법당국 조사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것들은 수사의뢰를 통해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경찰 수사 역시 커뮤니티 측이 적극 협조하지 않아 압수수색 영장 발부와 자료 분석 등을 거쳐 작성자를 특정하는 데만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등 속도를 내기 어렵다. 오히려 A씨가 받는 혐의에서 보듯, 문제 게시물을 삭제하거나 작성자 추적을 어렵게 하는 등 증거를 없애려는 위법 행위만 속출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특정인만 사용할 수 있는 제한적 커뮤니티는 '익명성'이 마케팅의 핵심이라 자료 요청 등 수사에 비협조적일 때가 많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