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를 찢고 나온 남자... '이도류' 오타니

입력
2024.03.2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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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LA다저스의 슈퍼스타 오타니 쇼헤이

편집자주

최근 가장 '핫'한 스포츠 이슈를 찾아 주요 인물의 스포츠 인생을 정리해보는 코너입니다. 프로 무대의 스타플레이어를 비롯해 아마추어 '신성', 지도자, 체육단체장 등 하루하루 숨 가쁘게 변화하는 스포츠 세상 속에 사는 인물들을 다양한 관점에서 들여다봅니다.

17일 서울 고척스카이돔 타석에 등번호 17번의 선수가 들어서자 관중석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1만5,000여 명의 응원을 한 몸에 받은 주인공은 메이저리그(MLB) LA다저스의 간판 스타 오타니 쇼헤이다. 이날 키움과의 연습경기에서 2번 지명타자로 선발 출전한 그는 예정된 두 타석을 모두 헛스윙 삼진으로 마무리 지었다. 그럼에도 팬들은 더그아웃으로 향하는 그를 보며 힘차게 박수를 쳤다.

팬들이 오타니에게 조건 없는 응원을 보내는 것은 평소 그가 보여온 특유의 성실함 때문이다. 이날도 그는 두 번째 타석에서 헬멧이 벗겨질 정도로 강하게 방망이를 돌렸다. 불과 3개월 전 '10년 7억 달러'의 초대형 계약을 맺은 슈퍼스타가 연습경기에서마저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팬들은 크게 감동했다.

그리고 이 장면은 그의 20년 야구인생의 축약판이기도 하다. 늘 화제의 중심에 서 있으면서도 성실함을 잃지 않는 ‘만찢남(만화를 찢고 나온 남자)’ 오타니의 성장과 활약을 훑었다.


부상이 준 뜻밖의 선물 ‘프로 이도류’

오타니에게 붙는 대표적인 수식어는 ‘이도류(투수·타자 겸업)’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투타겸업 프로선수’를 목표로 삼았던 건 아니다. 물론 오타니는 고향인 일본 이와테현 미즈사와시(현 오슈시)에서 리틀야구를 시작할 때부터 투타에서 맹활약했고, 하나마키 히가시 고등학교에서도 팀의 에이스와 4번 타자의 역할을 부여받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아마추어 무대에서의 활약이었다. 그는 프로 진출 후에는 투수로만 활동할 생각이었다. 오타니가 학창시절에 작성한 ‘만다라트 계획표(목표와 실천방식을 기술한 계획표)’에도 야구기술 항목에는 ‘시속 160㎞’ ‘구위’ ‘제구’ 등 투수 관련 내용만 적혀있다. 실제로 그는 일본 아마추어 선수 최초로 시속 160㎞를 달성하는 등 자신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고교 2학년 때 찾아온 악재가 뜻밖에도 ‘프로 이도류’ 탄생의 씨앗이 됐다. 그는 일본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여름 고시엔) 직후에 실시한 정밀검사에서 성장판 손상 진단을 받았고, 이 때문에 잔여 시즌에는 야수로만 경기에 출전했다. 애초에 타자로서도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던 오타니가 타격에만 집중하자 그의 실력은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됐다. 이듬해 전국선발고교야구대회(봄 고시엔)에선 우승팀인 오사카 토인 고등학교의 에이스 후지나미 신타로(뉴욕 메츠)를 상대로 홈런을 때렸고, 이 시기를 전후로 타자로서의 가치를 더 높게 보는 프로구단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국 진출 대신 선택한 자국 프로야구… 닛폰햄에서 완성된 이도류

이때의 성장은 오타니의 인생 항로가 완전히 바뀌는 계기가 됐다. 애초 그는 고교 졸업 후 곧바로 미국무대에 도전하기로 마음을 정한 상태였다. 성적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3년 내내 자신을 지켜봐준 MLB 스카우터에게 깊은 감명을 받아서다. 그는 이런 결심을 언론을 통해 대외에 알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일본프로야구(NPB) 닛폰햄은 오타니에게 신인 드래프트 1순위 지명권을 행사했다. 그가 프로무대에서도 이도류로 성공할 것이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오타니가 지명을 거부하고 미국으로 건너갈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구단은 지난한 설득작업에 돌입했다.

우선 오후치 다카시 당시 닛폰햄 스카우트 팀장이 열흘간 공들여 만든 약 30페이지 분량의 자료를 오타니 측에 전달했다. 이 자료에는 한국과 일본 고졸 선수가 마이너리그를 거쳐 MLB에서 성공한 확률은 5.6%에 불과한 반면 자국 프로야구를 경험한 후 MLB에 도전해 성공한 확률은 65%에 이른다는 통계가 담겼다. KBO의 1차 지명을 거부하고 미국에 진출한 남윤성과 비공개 경쟁입찰(포스팅시스템)을 통해 다저스 유니폼을 입은 류현진의 사례를 비교하기도 했다. 이 자료로 1차 설득과정을 마친 구단은 이도류 제안으로 쐐기를 박았다. 오타니는 투타겸업의 길도 충분한 도전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고 2012년 12월 9일 닛폰햄 입단을 발표했다.

결과적으로 이때의 결정은 ‘신의 한 수’가 됐다. 오타니는 데뷔 첫해에 제구 불안, 급격한 구위 저하 등으로 투수로서는 애를 먹었는데, 닛폰햄은 관리체계를 가동하며 1순위 지명 선수의 성장을 기다려줬다. 냉정한 MLB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시스템이었다. 구단의 배려 덕분에 오타니는 데뷔 첫해 3승 무패 평균자책점 4.23에 불과했던 성적을 2년 차인 2014년에 11승 4패 평균자책점 2.61로 끌어올렸다. 2015년엔 다승왕(15승)·승률왕(0.750)·평균자책점 1위(2.24)에 오르며 ‘투수 3관왕’을 달성, 리그 에이스 반열에 이름을 올렸다.

타자로서도 2016년(타율 0.322)과 2017년(0.332) 3할을 넘기는 등 대부분의 시즌에 안정적인 활약을 펼쳤고, △파워 △콘택트 △주루 △수비 △송구 능력을 모두 갖춘 ‘5툴 플레이어’로 자리를 잡았다. 그는 NPB 5시즌 동안 △일본시리즈 우승 1회(2016년) △퍼시픽 리그 최우수선수(MVP) 1회(2016년) △퍼시픽 리그 투수 베스트9 2회(2015·2016년) △퍼시픽리그 지명타자 베스트9 1회(2016년) 등을 달성했다. 그리고 2017년 11월 11일 드디어 꿈에 그리던 미국 진출을 공식선언했다.

꿈의 무대 MLB… 시련으로 더욱 빛난 성공

오타니의 NPB 통산 기록은 △투수 42승 15패, 평균자책점 2.52, 624 탈삼진 △타자 타율 0.286(296 타석 70안타), 48홈런, OPS(출루율+장타율) 0.858이다. 기록만 놓고 본다면 투수로도, 타자로도 NPB 최고 선수라 평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오타니의 포부는 남달랐다. 그는 미국 진출을 알리는 기자회견에서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되고 싶다”고 강조했다. 오타니의 궁극적인 목표는 일본이 아닌 더 큰 무대에서 정점을 찍는 것이었다.

그는 LA에인절스 유니폼을 입고 이 목표를 차근차근 이뤄갔다. 아메리칸리그 신인왕(2018년)에 등극했고, MLB 역사상 처음으로 ‘만장일치 MVP 2회(2021·2023년)’를 달성했다. 2022년 ‘10승·10홈런’을 기록하며 104년 전 베이브 루스를 소환한 그는 지난해에도 이를 재현하며 MLB 최초 ‘2시즌 연속 10승·10홈런’이라는 역사를 썼다.

이외에도 그는 △아메리칸리그 홈런 1위(2023년) △아메리칸리그 출루율 1위(2023년) △아메리칸리그 장타율 1위(2023년) △ALL-MLB 퍼스트팀 4회 선정(2021·2022·2023년(투타 복수 수상)) 등 야구 종주국에 선명한 발자국을 남겼다.

시련을 극복하고 이룬 결과물이기에 더욱 빛났다. 오타니는 MLB 데뷔 첫해 팔꿈치 인대접합수술(토미존 서저리)을 받고 투수로서는 쉼표를 찍어야 했다. 잠시 칼 하나를 내려놓았던 그는 2021년 23경기(130.1이닝)에 나서 9승 2패 평균자책점 3.18을 기록하며 재기에 성공했다. 지난해 두 번째 토미존 수술을 받은 그에게 우려보다 기대가 쏟아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높이 날아도 평온하라’ 쇼헤이(翔平)

오타니의 이름 쇼헤이는 한자로 翔平(날 상·평평할 평)이라 쓴다. 브레인스토어가 출간한 책 ‘선수 11-오타니 쇼헤이’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가 “명성을 떨치더라도 평온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선택한 글자다. 실제로 그는 이름대로 살고 있다. 천문학적인 연봉을 받으면서도 몇백만 원의 용돈으로만 생활한다고 전해지고, 옷과 신발도 주로 후원업체 뉴발란스의 제품을 입고 신는다. 또 최근 깜짝 발표한 결혼 상대자도 평범한 일본 여성이다. 그가 남들과 다른 도전에 나서고, 이 과정에서 맞닥뜨린 시련을 평탄하게 극복해 온 것 역시 본인의 이름에 담긴 함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름 외에도 그의 인생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 요소가 또 있다. 오타니는 묘하게도 인생의 변곡점에서 자주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닛폰햄행의 단초가 된 ‘30페이지 통계자료’가 한국 선수들의 데이터를 중심으로 만들어졌고, 야구 인생을 통틀어 타자로서 최악(타율 0.202)의 시즌을 보낸 2015년에는 ‘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WBSC) 프리미어12’ 한국전 호투로 자신감을 되찾았다.

공교롭게도 MLB 역대 최고 대우를 받은 후 출전한 첫 정규시즌 경기도 서울에서 열렸다. 그는 20, 21일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샌디에이고와의 MLB 개막 2연전에서 10타수 3안타 2타점 1득점 1도루의 호성적을 기록했다. 그러나 방한 기간 중 오타니의 '절친'이자 통역사인 미즈하라 잇페이의 도박논란도 함께 터졌다. 오타니가 이번 사건에 얼마나 연루됐을지는 추후 수사를 통해 밝혀질 것으로 보인다. 다시 한 번 인생의 분기점 앞에 선 그에게, 한국과의 이번 인연은 또 어떤 의미로 기억될까.

박주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