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색이 국회의원 선거다. 나를 대신해 나랏일 맡길 대표를 뽑는 가장 중요한 정치행사다. 이 당연한 얘기를 할 만큼 선거가 본질에서 완전히 이탈했다. 선거일이 임박했어도 응당 다퉈야 할 국가의제는 아예 운위조차 되지 않았다. 오직 심판론을 앞세운 적대감과 복수심으로 선거판이 난장이 돼 있다.
대상이 정권이건 야당이건 심판론은 가당찮은 얘기다. 독재, 독선, 탈법, 불통, 무능, 불공정 등 심판의 이유가 여야에 공히 해당하는 것일진대 누가 누구를 심판 운운하는가. 자기성찰 없는 양당의 내로남불식 심판론은 하도 같잖아 더 거론할 것도 없다.
심판론을 뒤집으면 그게 다시 독재론이다. 심판이 정치목표가 되면 어떤 내부비판이나 절충의견도 다 이적행위가 되고 당 지도부는 결사옹위 대상이 된다. 이게 독재가 아니고 뭔가. 여기서 투쟁력과 충성도는 정치력이 되고, 시정에서도 삼갈 막말이 감각적인 정치언어가 된다. 심판론은 끝없는 악순환이다.
국민의힘 대표 선출 과정이나 민주당의 이재명 표결 행태, 공천과정 등이 다 이런 정치문화의 반영이다. 상대적으로 합리적인 정치인들은 해당행위자로 몰려 제거됐고, 충성스러운 전투력이 튀는 이들은 거의 살아남았다. 전문성 강화, 소수배려 취지의 비례대표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이런 목적의 인선으로 채워졌다.
총선후보들은 그래서 정치인 아닌, 대우 괜찮은 여의도 직장에 취직하려는 구직자들로 보인다. 선명성, 충성심을 사는 이 입사시험에서 막스 베버의 정치적 소명의식 따위는 쓸데없는 오버스펙이다. 정치는 결국 직장 내 자리다툼, 힘 다툼이 되고 정작 주권자는 밖으로 소외된다. 거칠게 싸잡아 말했지만 부인키 어려운 우리 정치의 실상이다.
사실 정치인들만 뭐랄 것도 없다. 이런 토양은 유권자들이 함께 만든 것이다. “누구 이겨라”만 외쳐대다 정치판은 싸움꾼들이 유세 떠는 격투장이 됐다. 조국당 돌풍도 그런 것이다. 국가사법권까지 능멸하며 대놓고 정치를 한풀이 싸움터로 만들겠다는데 거기에 20~30% 지지를 보내는 국민은 뭔가.
이승만 박정희 YS DJ 같은 거대 지도자가 이슈를 던지고 국민이 객체로 동원되던 시대는 오래전에 지났다. 그런데도 고만고만한 정치인들의 싸움판에 휘둘리는 건 시대착오적이거니와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유권자가 주체성을 자각해야 한다는 말이다. 대표를 제대로 선택해 정치를 바꾸고 국가와 삶의 질을 발전시키는 건 오롯이 주권자 국민의 역할이자 책임이다.
어차피 양당은 이념지향과 정책에서 큰 차이가 없다. 경제 안보 측면에서 외파에 특히 취약한 현실상 그 차이도 갈수록 줄 것이다. 판세로 보아 한쪽이 압도적 우위를 점할 것 같지 않고, 그런들 어느 편이 낫지도 않으니 큰 의미도 없다. 그래서 정파 지역 인연을 떠나 봐야 할 건 후보 개인의 자질과 실력이다.
판단이 어려울 땐 부정적 요소를 지워나가는 게 방법이다. 선명한 투쟁가, 맹목적 충성파, 막말 전력자, 별 실적 없이 허명(虛名)에만 의지하는 자 등이 차례로 지울 대상이다. 이런 이들을 퇴출시키지 않고는 정치와 삶을 바꿀 방도가 없다. 그러다 보면 국가의 미래와 성장을 걱정하는 이, 전문성과 국제적 현실감각을 갖춘 이들이 그나마 추려질 것이다. 이상론일까? 그래도 적으나마 이들이 한 명이라도 더 진출한 정치권은 확실히 다를 것이다.
진부하지만 ‘국민은 딱 그 수준의 정부(정치)를 갖는다’는 경구는 진리다. 물론 온건합리적인 중도층 유권자들을 향한 주문이다. 어차피 선거결과는 중도 선택이므로. 현 정치에 공동책임이 있는 강성 지지자들에겐 기대할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