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항공기 보안은 허술했다. 1958년과 1969년에도 이미 여객기 납북 사건이 발생했는데도, 1971년 또다시 승객 60명을 태운 대한항공 여객기에 대한 납북 시도가 이뤄졌다. 1971년 1월 23일 오후 강원도 속초에서 김포공항으로 향하던 ‘포커F-27’ 쌍발 항공기에서였다.
이 비행기에는 총 60명이 탑승한 상태였는데, 사제 폭발물을 든 김상태(22ㆍ무직ㆍ강원 고성군 거진읍)가 북한으로 갈 것을 요구했다. 현장에서 사살되는 바람에 여객기를 납치하려던 동기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그 이전 납북에 성공한 사람들이 북한에서 잘 살고 있다는 루머를 믿고 일으켰을 가능성이 크다.
허술한 보안검색 때문에 김상태는 폭탄을 들고 탑승했고, 비행기는 오후 1시 7분 속초공항을 이륙했다. 이륙 직후 이뤄진 김상태의 자폭 위협으로 여객기는 기수를 북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승무원들과 승객들의 기지로 범인 주위를 분산시킬 수 있었다. 승무원들의 부탁으로 비행기가 휴전선을 넘어간 것처럼 승객들이 통곡을 하는 과정에서 범인이 한눈을 파는 틈을 놓치지 않고 최천일(27) 보안요원과 전명세(40) 수습조종사가 권총으로 김상태를 저격한 것. 다만 바닥에 떨어지며 점화된 사제폭탄을 전명세 조종사가 몸으로 막는 과정에 큰 부상을 입었다. 폭발 충격으로 기체가 손상됐지만, 이강흔 기장은 기체를 급강하해 오후 2시 18분 고성군 현내면 초도리 바닷가에 불시착했다.
예상치 못한 사고에도 한국일보는 이날 즉각 특별취재반을 꾸려 신속하게 대응했다. 사회부의 구용서 이행원 이성준 손위수 이재무, 사진부의 김운형 김인규 최동완 변창원, 지방부의 마일연 윤창형 박주환 기자 등으로 꾸려진 취재반이 경쟁지를 압도하는 기사를 쏟아냈다.
특히 26일 자 1면에는 비행기가 불시착을 위해 급선회하는 장면이 담긴 사진이 실렸다. 속초 주재기자 윤창형이 특종한 사진으로, 납북 위기를 모면하고 불시착하기 직전의 현장감 넘치는 사진이었다. 사진 필름을 마감시간에 대기 위해 달려오던 한국일보 취재차량이 새벽 2시 10분께 춘천 인근 동선폭포 앞길 빙판에 미끄러지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으나, 부상 투혼을 발휘한 사건기자의 노력으로 사진이 실릴 수 있었다.
한편 당시 대형참사를 막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한 전명세 조종사는 응급치료 후 서울로 후송 도중 "탑승객이 다칠까 봐 몸을 던졌다"는 유언을 남기고 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