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의 유대인 학살) 비판 영화로 제96회 미국 아카데미(오스카) 트로피를 안은 유대인 감독의 수상 소감이 논란에 휩싸였다.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에 맞서 가자지구에서 벌이고 있는 전쟁과 팔레스타인 점령 역사를 두고 이스라엘을 비판해서다. 그를 '나치 부역자'로까지 빗대며 이스라엘 여론이 끓어오르는 가운데, 일각에선 공감 목소리도 나온다.
12일(현지시간) 영국 가디언에 따르면, 데이비드 섀이터 미국 홀로코스트 생존자 재단(HSF) 회장은 공개 서한을 통해 유대계 조너선 글레이저 감독을 비판했다. 섀이터 회장은 공개 서한에서 "당신은 이스라엘을 비판하기 위해 아우슈비츠를 이용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해야 한다"며 "이스라엘의 탄생, 존재, 생존이 당신에게 '점령'과 동일시된다면, 본인의 영화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것"이라며 분노했다.
논란의 발언은 지난 10일 오스카 시상식에서 나왔다. 글레이저 감독은 아우슈비츠 사령관 가족의 일상을 그려내며 홀로코스트의 비인간성을 고발한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로 국제장편영화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그는 수상 소감에서 나치뿐 아니라 이스라엘에도 비판 목소리를 냈다.
글레이저 감독은 "우리의 모든 선택은 현재의 우리와 마주하고 성찰하기 위한 것"이라며 "우리는 유대인 정체성(Jewishness)과 홀로코스트가, 수많은 무고한 이들을 분쟁으로 이끈 점령에 강탈당하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으로서 이 자리에 섰다"고 말했다. 이어 "가자지구에서 이어지고 있는 공격의 피해자와 10월 7일의 이스라엘에서 발생한 피해자 모두 이런 비인간화의 희생자들"이라고 강조해 박수를 받았다.
글레이저 감독의 발언은 유대인 사회의 분노를 촉발했다. 대니 다논 전 유엔 주재 이스라엘 대사는 "유대인 감독이 선택의 여지 없는 전쟁을 홀로코스트에 빗댄 반유대주의 발언을 한 것은 유감이지만 새롭진 않다"며 "홀로코스트에도 유대인 학살에 동참한 유대인들이 있었다"고 글레이저 감독을 맹비난했다. 미국의 유대인 단체 반(反)명예훼손연맹 또한 "그는 가장 끔찍한 종류의 테러리즘을 변명했다"고 격분했다.
이스라엘은 과거 홀로코스트의 피해자였지만, 지금은 가자지구 팔레스타인인 집단학살의 가해자로 지목받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지난해 12월 "팔레스타인인 말살 의도를 갖고 집단학살을 하고 있다"며 이스라엘을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했다. 최종 판결엔 수년이 소요되지만, 지난 1월 ICJ는 남아공의 주장 중 적어도 일부는 "타당하다"고 봤다. 미국 AP통신은 "이스라엘은 국가 정체성에 깊이 뿌리내린 바로 그 범죄를 저지른 혐의를 유엔 최고 법원에서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스라엘 내부에서도 글레이저 감독에 공감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휴전을 촉구해 온 유대인 단체 '이프낫나우' 창립자 요나 리버만은 엑스(X·옛 트위터)에서 글레이저 감독 발언에 "인간성에 대한 명백한 헌신"이라며 박수를 보냈다. 이스라엘 퇴역 군인 단체 '브레이킹 더 사일런스'도 X를 통해 글레이저 감독을 지지하며 "공감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