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번째 일본인 수상자다. 지난 5일(현지시간) '건축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프리츠커상의 수상자로 일본 건축가 야마모토 리켄(79)이 선정되면서 일본은 1979년 상 제정 이래 미국(8명)을 제치고 가장 많은 수상자를 배출한 국가가 됐다. 한국 수상자는 0명이다. 국내 건축계에선 "내년에도 한국 건축가의 수상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는 전망이 나왔다. 여기엔 한국 건축의 세계성을 보여준 건축가가 없고, 국내 건축 환경이 건축가의 역량을 키우기엔 열악하다는 공감대가 깔려 있다. 대부분의 프리츠커상 수상자들이 명성을 쌓은 공공건축 분야에서 한국은 여전히 '건축 후진국'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한국인 수상자가 없느냐'가 아니라 '많은 수상자를 배출한 나라의 비결이 무엇이냐'를 고민해야 한다고 꼬집는다. 상을 주관하는 하얏트재단은 후보자 명단을 공개하지 않고, 과거 수상자, 건축가, 학계 등 다양한 건축 분야 사람들에게 후보 추천을 받아 수상자를 선정한다. 일본이 최다 수상자를 배출한 건 우수한 건축가 인력풀이 풍부하다는 방증이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일본인 건축가 도미이 마사노리 한양대 명예교수는 "일본은 건축을 국가를 설계하는 싱크탱크로 여긴다"며 "주요 대학에서 재능 있는 건축가를 도제식 전통으로 양성하고 사회에서도 서로 밀고 끌어주며 성장한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 건축가들은 개인 역량은 뛰어나지만 각자도생하는 분위기가 강하다"고 했다.
전통을 중시하는 장인문화도 일본 건축가 집단의 역량을 키웠다. 도미이 교수는 "일본 건축가들은 전통을 현대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발전시키려는 성향이 짙다"며 "건축학도들은 해외로 유학하는 것보다 일본 고유의 건축 철학과 노하우를 이어 받아 건축적 답을 구하는 방식을 선호한다"고 설명했다. 야마모토 역시 니혼대 건축과를 졸업한 뒤 1973년 건축사무소를 연 국내파로, 공적·사적 영역을 가리지 않고 자신만의 건축 철학을 펼쳐왔다.
반면 한국은 경직되고 폐쇄적인 업계 분위기가 건축가의 성장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작용한다. 모든 건축 시스템이 아파트 위주로 돌아가는 까닭에 건물의 완성도·예술성보다는 실용성·효율성을 따진다. 정태종 단국대 건축학부 조교수는 "야마모토의 경기 판교 타운하우스는 공동주택의 공간 일부를 투명하게 만들어서라도 사람들을 마주치게 해 소통을 늘리자는 취지로 안이 들여다보이는 식으로 설계됐는데 혹평을 받고 미분양이 됐다"며 "안정적이고 무난한 것을 추구하는 한국적 정서에선 환영받지 못했지만 세계 건축계에서 의미 있는 시도로 받아들여졌고, 결국 프리츠커상 수상으로 이어졌다"고 했다.
공공 건축 분야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건축물의 '우수성'보다 '공공성'에 집중하는 세계 건축계 추세에 조응하지 않은 채 공정하지 못한 설계 발주부터 불투명한 시공 시스템까지 낡은 관행에 갇혀 있다는 게 중론이다. 한 건축가는 "공모전 당선작도 발주·시공 과정에서 공기와 비용 등을 문제로 수많은 입김이 들어가 처음과 완전히 다른 건물이 되는 경우가 흔하다"며 "건축은 아이디어가 아닌 실제 지어진 작품을 평가할 수밖에 없는데, 차마 포트폴리오라고 할 수 없는 결과물을 마주하며 건축가로서 자괴감을 느낄 때가 있다"고 토로했다. 건축가의 역량 외에 건축문화 전반과 시스템의 발전이 뒷받침돼야 하는 이유다.
최근 건축사 풀이 커진 점, 유수 해외 설계사무소를 경험한 젊은 건축가 집단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점 등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기대도 있다. 일본의 유명 건축사무소에서 일한 뒤 귀국해 독립한 40대 건축가는 "40~50대에 접어든 건축가들이 해외 유학, 세계적 건축가 사사 이후 돌아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분투하고 있다"며 "한국 사회가 직면한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축적되면 한국 건축의 인지도가 천천히 올라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