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학으로 인생을 바꾸다' 한국서 스타트업 대표 된 대만인 서유라 레모네이드 대표

입력
2024.03.13 05:00
17면
미국 캐나다 호주 등 세계 곳곳에서 산 대만 출신의 노매드 창업가
'재미없는 공부는 가라' 즐거운 영어공부 위해 공학적 교재 설계
상반기 중 대만 진출 예정

어학 사업은 곧잘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비유된다. 히트곡이 나오면 인기를 끌다가 사라지는 가수처럼 반짝 떴다가 없어지는 어학 상품이 많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어학 사업 특유의 맹점이 작용한다. 우선 차별화하기 힘든 동일한 내용을 가르치면서 경쟁이 치열하다. 중도에 포기하는 이용자들도 많다. 그러다 어떤 계기로 다시 어학 공부를 결심하면 다른 교재나 강좌로 갈아탄다. 한마디로 충성도 높은 고객이 많지 않다.

그래서 어학은 '표지 갈이로 이용자를 모은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즉 같은 교재라도 표지와 강사를 바꾸면 새로 이용자가 생긴다는 뜻이다.

이처럼 변덕 심한 어학 사업에서 눈길을 끄는 신생기업(스타트업)이 있다. 성인들을 대상으로 영어 학습지를 발행하고 1 대 1 인터넷 강의를 하는 레모네이드다. 이 업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대면 수업하던 학원들이 된서리를 맞았을 때 집에서 공부하는 학습지를 발행해 인기를 끌었다. 또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방식의 1 대 1 인터넷 강의로 수강생의 부담을 줄여줬다.

이런 독특한 방식은 특이한 경력을 가진 서유라(33) 레모네이드 대표의 작품이다. 그는 우리말을 유창하게 구사하는 대만인이다. 이 땅에서 나고 자란 사람처럼 된소리 발음을 능숙하게 해 인터뷰 내내 '대만인 맞나'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서 대표를 서울 테헤란로 레모네이드 사무실에서 만나 이색 창업기를 들어 봤다.


지구촌 곳곳을 떠돌다

서 대표는 대만에서 거의 살아본 적이 없는 대만인이다. 사업하는 아버지를 따라 아기 때 인도네시아로 건너가 10년 살았고 중국 상하이에서 4년간 체류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조지 부시 대통령 부자 등 미국 유명인들이 다닌 사립학교 필립스 엑스터 고교를, 캐나다에서 토론토 대학을 나왔다. 중간에 필리핀과 호주에도 잠시 머물렀다. 그야말로 지구촌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노매드(유목민) 같은 삶을 살았다. "어려서부터 떠돌아다녀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어요. 대학 가서 특이하게 산 것을 알았죠."

사업에 영향을 미친 노매드 같은 삶은 장단점이 있다. "다양한 문화를 습득한 것은 장점이죠. 미국에서는 대화할 때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으면 무시한다고 생각해요. 반면 한국에서는 같은 행동을 당돌하다고 보죠. 이런 문화적 차이를 통해 세상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을 배웠어요. 반면 세계 곳곳에 친구가 퍼져 있지만 깊게 오래 사귄 친구가 없는 것은 단점이에요."

한국어를 배운 것은 아이돌 그룹 신화 때문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한국의 영어방송 아리랑TV에 나온 신화를 보고 한국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한국어를 독학했죠."

그는 인터넷 대화방에서 우리말을 배웠다. "인터넷으로 영상 대화를 하며 한국어를 익혔어요. 무조건 인터넷에서 한국 사람을 보면 말을 걸었죠. 중고교 시절 제2외국어도 한국어로 택했어요. 한국이 너무 좋아 한국을 자주 방문했고 결혼도 한국 남자와 했죠."

보이지 않는 한계 넘으려고 서울행

서 대표의 사업 도전은 처음이 아니다. 대학에서 통계학을 전공한 그는 졸업 후 부모 몰래 창업했다가 망한 적이 있다. 첫 번째 실패는 약이 됐다. "대학에서 창업펀드의 지원을 받아 한국 옷을 수입해 캐나다에서 판매하는 의류 사업을 했어요. 상품은 잘 팔렸으나 재고 관리를 하지 못해 1억 원 빚을 지고 망했죠. 부모님에게는 사업이 잘되면 얘기하려고 숨겼어요. 그때 회계와 비용 관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죠."

빚은 스타트업 육성업체 겸 투자사 엑스트림 벤처캐피털에 취직해 갚았다. 이곳에서 그는 창업자들을 많이 만나 사업에 필요한 것들을 배웠다. 하지만 한계도 봤다. "백인 위주 사회에서 동양인에게 보이지 않는 제약이 있었어요. 그런 한계가 없는 곳을 가기 위해 서울, 상하이, 일본 도쿄 등 3군데를 놓고 고민하다고 제일 먼저 서울을 찾았죠."

그때 우리말 이름을 지었다. "본명이 쉬셴위(徐先玉)예요. 친구가 예쁜 이름이 필요하다며 유라로 지어줬죠."

운 좋게 서울에서 첫 번째 면접을 본 스타트업 데이원컴퍼니에 2016년 덜컥 합격했다. "면접 보고 다음 날 바로 출근했죠. 이강민 데이원컴퍼니 대표가 어떤 일을 하고 싶냐고 묻길래 외국어 신사업을 하겠다고 했어요."

그렇게 그는 1년여간 준비해 2018년 데이원컴퍼니의 레모네이드 신사업을 시작했고 2021년 사내 스타트업(CIC)을 만들어 대표를 맡았다. "신사업을 준비하는 1년 동안 날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10시까지 혹독하게 일했어요. 완벽한 준비를 위해 강사부터 고객 상담까지 1인 다역을 하며 다양한 경험을 했죠."

CIC를 만든 이유는 빠른 의사 결정과 사업 간 영향을 줄이기 위해서다. "한 회사에서 여러 사업을 할 경우 각 사업을 CIC로 만들면 안 되는 사업이 있어도 다른 사업에 영향을 주지 않아요. 반면 돈을 벌지 못하면 눈치가 보이죠."


비타민 같은 외국어 교육 만들어

성인 대상의 수많은 어학 서비스와 경쟁하기 위해 서 대표가 강조한 것은 즐거움(fun)이다. 학습지와 1 대 1 인터넷 강의 등 6개 서비스는 모두 놀이하듯 즐겁게 배울 수 있는 방법에 초점을 맞췄다. "공부는 재미있어야 오래 해요. 학습자 스스로 교재에 손이 가도록 만들어야죠."

재미를 위해 선택한 방법이 책을 나누는 분권이다. "한국 고교생들이 보는 벽돌 두께의 수학 참고서를 보고 충격받았어요. 1950년대 책 같았어요. 우리는 교재를 마칠 때마다 성취감이 올라가도록 분권으로 교재를 얇게 쪼갰어요."

또 고려대 어학 교수들의 자문을 통해 공학적으로 학습지의 난이도를 설계했다. "모르는 내용 40%, 알 만한 내용 20%, 다음 예습을 위한 내용 40%로 교재를 구성해요. 모르는 것만 가르치면 안 돼요. 아는 내용을 섞어야 흥미가 생겨 계속 공부해요. 아는 내용은 반복 학습 효과로 쉽게 외울 수 있어 동기 부여를 하죠."

대상을 성인으로 정한 이유도 즐거운 공부를 위해서다. "학교처럼 문법 교육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비타민 같은 어학 강의를 만들고 싶었죠."

주력 사업인 학습지는 11개 국어를 배울 수 있는 초보자 대상의 '가벼운 학습지'와 중고급자 영어 학습자를 위한 '뉴스프레소' 등 두 가지다. "가벼운 학습지는 일주일에 한 권씩 공부할 수 있도록 1년 과정으로 구성했어요. 뉴스프레소는 하버드비즈니스리뷰, 타임, 이코노미스트 등 해외 언론들과 계약을 맺고 정치 경제 시사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죠."

서 대표가 미래의 전략사업으로 꼽는 1 대 1 인터넷 강의 '포도'는 지난해 3분기에 수학 문제풀이 앱 '콴다'로 유명한 매스프레소의 자회사 하이픈스를 인수해 만들었다. "가장 효과적인 어학 공부 방법이 1 대 1 강의죠. 선생이 기다리면 꾸준히 공부하게 돼요. 특징은 수강생들이 원해서 학생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했어요."

재미있는 것은 젊은 영어를 가르치는 인터넷 강의 '워너스픽'이다. 워너스픽은 미국 젊은이들이 요즘 사용하는 영어 표현을 가르친다. 이를 위해 구독자 1,000만 명을 가진 유명 영어강사 샤이니와 함께 만들었다. "요즘 영어와 옛날 영어는 달라요. 젊은이들이 인터넷으로 만난 외국인 친구들의 표현을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려고 만들었어요. 반응이 아주 좋아요."

이용료는 월 4회 수업하는 1 대 1 강의의 경우 월 5만 원, 학습지는 연 30만 원이다. 인터넷 강의는 27만 원을 내면 평생 수강할 수 있다.


상반기에 대만 등 해외 진출 예정

즐거움을 추구한 차별화 전략 덕분에 이용자는 계속 늘고 있다. "학습지와 인터넷 강의 이용자는 모두 80만 명이에요. 1분기 지나면 100만 명이 넘을 겁니다."

매출이 계속 증가하며 영업이익을 내는 등 실적도 좋다. "연매출이 2018년 27억 원에서 지난해 7배 이상 뛴 200억 원을 기록했어요. 올해는 전년 대비 2배 이상 매출이 목표죠."

관건은 판촉 활동 등 마케팅이다. 교육사업은 동일한 상품을 다시 구매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따라서 신규 이용자를 확보하려면 마케팅을 많이 해야 한다. 이 업체도 직원 70명 가운데 45명이 마케팅 인력이다. "마케팅팀이 유튜브 등 인터넷에 올리는 광고 영상을 예술작품처럼 공들여 직접 만들어요."

앞으로 서 대표는 해외 진출에 집중할 계획이다. "상반기 중 대만에 진출 예정이에요. 현지 법인을 세워 영어 학습지와 1 대 1 강의를 시작해야죠. 대만은 학습지 학구열이 높아요. 대만을 해외 진출 시작점으로 삼아 내년에 인도네시아에도 진출할 계획입니다."

그는 대만과 인도네시아의 경우 영어 공부에 대한 의욕이 높으면서 인건비가 한국보다 낮아 현지 진출이 쉽다고 봤다. "대만의 상위 회사 대졸 초봉이 월 220만 원 수준이에요. 인도네시아는 월 50만 원 선이어서 현지 법인 비용이 한국보다 덜 들죠."

서 대표의 장기적인 꿈은 스타트업을 돕는 벤처투자사나 육성업체를 만드는 것이다. "어학에 스타 기업이 별로 없어서 회사를 우선 스타 기업으로 키우고 싶어요.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훗날 벤처투자사나 스타트업 육성업체를 만들어 죽을 때까지 혁신을 느끼는 것이 꿈이에요."

최연진 IT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