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구호품 관련 사고가 또 발생했다. 8일(현지시간) 공중에서 투하된 구호품의 낙하산이 펼쳐지지 않아 주민 5명이 이에 맞아 숨졌다는 보도가 나왔다. 지난달 29일 이스라엘군이 구호품 트럭에 몰려든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총격을 가해 100여명이 숨진 데 이어 또 다시 구호물자를 받으려던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미국 CBS방송, 영국 BBC방송 등은 이날 가자지구 보건부와 현지 의료진, 목격자들을 인용해 가자지구 북부 알샤티 난민촌에 투하된 구호품이 낙하산 고장으로 추락해 주민 5명이 숨지고 10명이 다쳤다고 전했다.
주민들은 굶주림을 달래고자 지붕 위에 올라가서 구호품을 기다리다가 변을 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가자주민 무함마드 알굴(50)은 AFP통신에 “밀가루 한 봉지라도 얻으러 공중 투하된 구호품 쪽으로 가는데 갑자기 낙하산이 펼쳐지지 않은 채 주택 한 곳의 지붕 위로 로켓처럼 떨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지붕 위에 구호품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이 숨지거나 다쳐 병원으로 이송됐다고 덧붙였다. CBS는 “사망자 중 소년 2명이 포함됐고, 부상자는 30~50대”라고 전했다.
이날 참사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로 진입하는 육로 국경을 차단한 가운데 발생했다. 가자지구와 국경을 맞댄 이집트 등에는 국제사회가 보낸 트럭 수백 대 분량의 구호물자가 대기하고 있으나, 이스라엘의 통제로 반입되지 않고 있다. 이에 지난 6일 어린이 18명이 굶어 죽는 등 인도주의 위기가 극에 달하자 국제 사회는 구호물자를 군 수송기로 투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육로에 비해 효율성이 크게 떨어져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한 데다가, 이날 급기야 추락 사고까지 발생했다.
BBC는 "가자지구에 구호품을 전달하는 일은 어렵고 위험한 일이 됐다"며 "구호단체들은 공중 투하 전술이 최후의 수단일 뿐, 급증하는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다고 말한다"고 지적했다.
가자지구 위기는 끝이 안 보인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전날 가자지구에 '임시 구호 항구'를 지어 바닷길로 매일 200만명 분의 음식을 반입하겠다고 밝혔으나, 이날 미 국방부는 항구 완공까지 최대 60일이 소요될 것이라는 추산 결과를 발표했다. 이미 아사 직전까지 내몰린 가자지구 주민들이 기다리기에는 건설 기간이 너무 길다.
파이클 파크리 유엔 식량권 특별보고관은 이날 “미국이 (최우방국인 이스라엘에게 국경을 열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대신) 항구 건설에 의지하는 것은 터무니없다”며 “오는 11월 미국 대선을 앞둔 바이든 대통령의 '국내 선전용 보여주기’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비판했다.
다만 미국 측 구상과 별개로 가자지구 구호 항로가 예상보다 빠르게 마련될 가능성도 있다. 앞서 유럽연합(EU)도 이르면 9일 회원국인 키프로스에서 선박을 출항시켜 해상으로 가자지구에 구호품을 전달하겠다고 밝힌 상황이기 때문이다. BBC는 "미국과 EU가 상대방의 계획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두 계획이 서로 어떻게 연관되어 작동할 것인지는 불분명하다"고 짚었다.
임시 휴전 협상도 진척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이슬람 최대 명절인 라마단 기간(잠정 3월 10일~4월 9일) 전 협상 타결을 강력히 주장해 온 바이든 대통령도 최근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지난 5일 "휴전이 성사되지 않으면 매우 위험할 것"이라고 발언한 데 이어, 이날은 "타결이 어려워 보인다"고 선을 그었다. 가자지구 철수를 요구하는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와 이에 반대하는 이스라엘 간 이견이 끝내 좁혀지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강경론을 고집하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미국 측 압력에도 아랑곳 않는 모습이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전날 미국 의회에서 국정연설을 마친 바이든 대통령은 마이크가 켜져 있는지 모른 채 한 상원의원과 대화하는 과정에서 “비비(네타냐후 총리의 애칭)에게 당신과 나는 ‘예수 앞으로 나아가는 만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언급했다.
로이터는 “'예수 앞 만남'은 직설적인 대화를 뜻하는 미국식 표현”이라며 “네타냐후 총리를 설득하지 못하고 있는 데 대한 바이든 대통령의 좌절감을 보여주는 신호”라고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