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 '한국민'의 완성은 나당전쟁의 최후 일전, 즉 신라가 대승을 거두었던 매소성 전투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한반도와 만주에 정립했던 세 나라가 하나가 된 삼한일통을 이룬 사건이자, 삼국의 후예들이 합심하여 당군을 몰아낸 역사다. 그런데 중국과 삼국사기 기록에 보이는 매소성 위치가 애매하다. 논쟁이 반세기나 지속되었지만, 아직도 의문으로 남아 있다. 양주 대모산성이나 연천 대전리 산성이 유력하게 비정되었고, 각각의 지자체는 매소성을 홍보한다. 과연 어디일까. 누구든 이 질문을 들고서 고고학 여정에 나선다면, 고대 그리스 신화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암송하고 아가멤논 성을 찾아 나섰던 슐리이만과 다르지 않으리라.
나당(羅唐)전쟁의 현장이었던 임진강과 한탄강은 민족사의 가장 역동적 현장이다. 오늘날도 서부전선의 남북분단 현장이지만 고대에도 경계이자, 길이 되기도 했던 한반도 삼국 충돌의 현장이었다. 한때 가야를 치기 위해 태백산맥을 넘어 영남지역 깊게 진출하기도 하였지만, 고구려의 남쪽 마지노선은 임진강이었다. 반면 남쪽에서는 신라가 6세기 중엽 진흥왕대에 차지한 한강유역을 방어하기 위한 최전선으로서 임진강과 한탄강을 지키고자 하였다. 적성읍의 남쪽 고갯마루에 있는 칠중성(七重城)은 바로 그 아래에 말 타고 바로 건널 수 있는 고랑포 여울을 지키기 위해서 신라가 쌓은 성이다. 칠중성의 반대편 강절벽 위에 해당되는 호로고루를 비롯한 고구려 성들이 강의 북안을 따라 있듯이 신라의 방어선도 칠중성뿐은 아니었을 것이다.
당나라의 도움으로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켰지만, 삼한일통(三韓一統)의 대업은 나당전쟁에서 결정됐다. 당초 약속과 달리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도 당나라가 삼국고토를 자기네 영토처럼 간주하고, 문무왕을 일개 지역관리라고 할 수 있는 '계림주도독'으로 임명한 것을 신라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설오유와 고구려 유민 고연무를 670년 요동으로 보내, 당의 말갈병을 쳐부숨으로써 신라는 본격적인 대당 전쟁을 개시했다. 그리고 곧이어 고구려와 백제의 옛 영토에서 지역 유민들과 합세하여 당의 세력을 축출하는 일에 본격 착수했다. 결국 당이 672년 웅진도독부를, 매소성 전투 이듬해인 676년 평양의 안동도호부를 요녕지역으로 옮기면서 신라는 대동강 이남의 영토를 확보하고 7년간의 통일전쟁은 막이 내리게 된다.
물론 당과의 마지막 전투는 금강하구 기벌포 해전(676년)이다. 설인귀(薛仁貴)가 이끄는 당 수군이 오늘날 오두산성으로 비정되는 천성(泉城)에서 신라군에 깨어졌다. 그러나 바로 직전인 675년 9월 말갈 출신의 이근행(李謹行)이 이끄는 당 주력부대가 신라에 의해 육상에서 완벽하게 격파됐던 전투가 바로 매소성 전투다. 아버지로부터 비겁하게 살아남았다는 꾸지람을 들었던, 김유신의 아들 원술랑(元述郞)이 결사분전하였던 현장이었다. 고구려·백제 유민들도 참가하였다는 점에서는 삼한이 마침내 하나가 되어 외세를 축출한 역사적 대사건이기도 하다.
나는 고고학 인생 반세기 동안 전곡유적을 발굴하느라 셀 수 없을 정도로 3번 국도를 오갔다. 그때마다 매소성 위치 논쟁이 머리를 스치곤 하였다. 왜냐하면 현재까지 매소성으로 비정되는 두 개의 성들, 양주 대모산성과 연천 대전리 산성, 모두 전곡으로 가는 길목에 있기 때문이다.
3번 국도 바로 옆에 있는 양주시청에서 서쪽으로 멀지 않은 대모산성은 평지에 우뚝 솟은 모습인데 서문지에서 내려다보는 넓은 양주마을 석양 풍경은 장관이다. 반면 대전리 산성은 양주시청에서 3번 국도를 타고 북으로 향하면 신라토성이 있는 초성리를 지난 뒤 나타난다. 한탄강 다리에서 동편으로 보이는 강위에 떠 있는 듯한 작은 산이다. 왜 이 두 성을 유력하게 매소성으로 비정을 하게 되었을까? 혹시 다른 성일 가능성은 없을까?
양주 대모산성은 임진강과 한강 사이의 최단거리 중간에 해당되는 교통로의 거점이다. 신라 지명으로 보이는 '현촌현(玄村縣)'이 새겨진 청동도장, 청동거울이나 팔찌, 갑옷용 철판, 수레구 등의 발굴품으로 미뤄 큰 관아가 있었던 곳이다. 양주분지 서편 불곡산 등 큰 산 사이에 있는 이 성이 애초에 매소성일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유는 삼국사기에 양주(楊州) 창화(昌化)라고 적혀 있고, 원래 지명이 고구려 시대 지명이 ‘물골’이라는 뜻을 가진 매성(買城)이라는 점 말고도, 적성의 칠중성을 공격한 당군이 남하할 수 있는 장단도로(長湍渡路) 길목에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 주변 지역이 넓어서 수만의 대군이 주둔할 수 있는 것도 이유로 꼽혔다.
다만 최근 후삼국시대 태봉국 관련 목간이 출토되어 주목을 끌기도 하였지만, 정작 당나라 축출을 상징하는 매소성으로 추정할 만한 유물이 발굴되지는 않았다. 신라의 결사적 방어선인 적성 칠중성을 넘지 못한 당군이 이곳까지 진출하였을 가능성을 낮게 보는 견해도 있다.
다음은 대전리 산성이다. 연천 청산면 대전리에 있는 이 테뫼식 산성에서는 강 건너 북서편에 한탄강이 감싸고 도는 평탄한 지형의 전곡리 선사유적도 내려다보인다. 길이가 670m밖에 되지 않는 작은 성이 매소성일 가능성은 1970년대 후반에 제기됐다. 이후 꽤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이곳도 양주이고, 3번 국도에 해당하는 철원-연천-양주-구리로 연결되는 한강으로의 통로에 있고, 도보로 강을 건너가 수월하기 때문이다. 매소가 여울물을 의미할 수도 있어서 한탄(大灘)으로 부르는 이 지역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동안의 발굴에서 드러난 축성 기술로 보아서 신라가 점령한 6세기 중엽 이후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하고 있지만, 성내의 주둔지 면적이 작고 이곳에서도 정작 당군이 주둔한 매소성일 가능성을 보여주는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제는 다른 시각에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삼국사기에는 '9월 29일 이근행이 군사 20만을 이끌고 매소성에 주둔하였는데, 아군이 공격하여 쫓아버리고 말 3만384필를 얻었으며 병장기도 그만큼 되었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따라서 20만 명이 아니라도 적어도 수만 명이 성내 그리고 성 주위에 배치되어야 하는데 두 성 모두 규모가 작아서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다.
대전리 산성의 경우에는 대군을 수용할 수 있는 평탄지형이 강 건너 오늘날 전곡 선사유적이 되거나 초성리 북쪽, 즉 청산리 일대의 평지인데 위치상으로 강으로 격리되어 있다. 대모산성도 평지에 펼쳐진 진(陣)들과 격리되어 전투를 지휘하기에는 어려운 상황이어서, 두 성 모두 구조적으로 부합되지 않는 여건인 셈이다.
결국 본질적 물음을 하게 된다. 우리가 현재 드러난 산성 유적들에 집착하여 무리하게 연결하여 해석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성'이라는 명칭은 특정 지역을 말하기 위해서 사용된 것은 아닐까. 어쩌면 매소성 위치에 대한 고 박정희 대통령의 관심으로 본격적 학술조사가 시작될 당시에 양주 고읍을 대상으로 두었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수 있겠다.
대전리 산성 건너편에 펼쳐지는 전곡평원은 현무암 수직 단애로 둘러싸여 천혜의 방어요충이다. 한탄강에서 평원 위로 진입하는 작은 계곡의 단애 상부에는 고구려 성들이 남아 있다. 바로 은대리성과 현재 전곡선사박물관의 뒤편에 있는 부서진 성의 흔적이다. 평원의 가장자리에 남아 있는 둔덕은 토성일 가능성이 있는데 과거 구석기 유적 발굴과정에서 삼국시대 토기가 불탄 자리에서 발견되기도 하였고, 목책열을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구덩이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흔히 비정되는 앞서 두 산성에서 확실한 증거가 없으니 3만 마리 이상의 말과 수만 명의 당군을 수용할 수 있는 전곡평원의 이러한 유적들이 범상치 않게 보인다. 아직도 그 위치를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외세의 지배야욕을 일찍이 물리친 '매소성의 승리'가 우리 민족사에 던지는 상징성은 강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