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욕의 한반도평화교섭본부

입력
2024.03.08 17:00
18면

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북핵 협상이 활발했던 2007~2008년 6자회담 수석대표 겸 한반도평화교섭 본부장 사무실에선 비공식 설명회가 자주 열렸다. 의자도 얼마 없는 사무실에 기자들이 북적댔기에 ‘봉숭아학당’이라 불렀다. 핵과 미사일에 대한 지식을 넓힐 기회이자 협상의 전반적 흐름을 파악하는 장이었다. 팩트에 목마른 기자들과 설명이 필요한 본부장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환경이다. 자기 이해에 맞게 팩트를 흘리는 미국, 일본 분위기에 경도되지 않게끔 협상 방향과 갈래를 잡아주는 기능을 했다.

□언론에 '프렌들리'했던 천영우 초대 본부장 시절 풍경이다. 국제원자력기구(IAEA), 군축, 대북 경수로사업 업무를 접했던 경험이 낳은 자신감이다. 당시 미국과 북한의 6자회담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와 김계관 외무성 부상을 오가며 영변 원자로 불능화 등 2·13합의를 끌어낸 것도 협상력뿐만 아니라 전문가 식견이 바탕이 됐다. 한반도평화체제의 그림을 그릴 동아시아 다자안보협력체가 6자회담 내에서 구체화한 것도 이때다. 노무현 당시 대통령도 청와대 내 386그룹과의 대립구도에서 천 본부장에게 힘을 실어줄 정도였다.

□하지만 북한의 우라늄 농축 은폐 의혹이 불거지면서 빈번하게 열린 6자회담은 2009년을 끝으로 긴 휴지기를 맞았다. 북핵 협상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이 주 임무인 한반도평화교섭본부 역할도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 6자회담 방식, 즉 ‘보텀 업’에 대한 회의론이 커져갔다. 북핵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들어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협상을 시도하는 '톱 다운' 방식으로 전환됐다. 주목받기 좋아하는 트럼프 스타일이다. 북한으로선 핵 개발 당시엔 시간 벌기용으로 6자회담 효용성이 있었겠으나 핵과 미사일 고도화에 매진하는 지금은 오로지 미국과의 담판이 관심이다.

□한반도평화교섭본부가 간판을 내린다. 지난달 말 김건 본부장이 뜬금없이 국민의힘에 입당할 때부터 정해져 있던 셈이다. 외교정보, 국제안보 업무 등을 맡는 외교정책전략본부 산하에 '평화'가 빠진 한반도정책국으로, 기존 2국 4과에서 1국 3과로 축소된다. 영욕의 18년에 수명이 다했다.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 여정의 암울한 미래를 보는 듯하다.

정진황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