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역내 방위산업을 키우기 위한 장기 전략을 5일(현지시간) 발표했다. 기본적으로는 '경제공동체'인 EU가 자체 방산 전략을 마련한 건 처음이다. 안보와 관련해선 미국이 주도하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의 협력에 의존해 왔던 EU가 '국방의 통합'까지 도모하고 있는 셈이다.
이 같은 변화는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러시아가 유럽 전역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서 비롯됐다. 게다가 올해 11월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미 대통령이 재집권에 성공하면 나토 기능이 약화할 것이라는 우려마저 커지고 있어, 방산 역량 확충을 위한 EU의 발걸음은 더욱 분주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EU 행정부에 해당하는 EU 집행위원회는 이날 향후 10년간의 방산 목표·전략을 담은 '유럽 방위산업 전략(European Defenses Industrial Strategy·EDIS)'을 공개하며 "유럽 땅에서 재래식 고강도 전쟁이 다시 시작되는 상황에서 대비 태세를 강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러시아 등으로부터의 위협에 대응하려면 장기적·구조적 틀이 마련돼야 한다는 취지다.
지난 2년간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쏟아부은 탓에 유럽 무기고가 텅 비게 된 것도 장기 전략 마련의 압박 요인이 됐다. EU는 이달 말까지 우크라이나에 탄약 100만 발을 제공하기로 약속했으나, 재고 부족으로 절반 수준밖에 전달하지 못했다. EU는 우크라이나가 무기를 자체 조달할 수 있도록 방산 협력을 강화할 방침이다. 카미유 그랑 전 나토 국방 투자 담당 사무차장보는 "(EDIS는) 전략적 패러다임 전환에 대한 광범위한 대응"이라며 "EU가 '국방'은 한동안 사라지지 않을 주제라는 점을 인식한 것"이라고 미국 폴리티코에 말했다.
EU 집행위는 향후 목표를 분명히 제시했다. 우선 ①27개 회원국에 '2035년까지 국방 조달 예산의 최소 60%를 EU 내에서 지출하라'고 권했다. '무기 자급자족' 비율을 높이자는 것이다. EU는 그간 무기의 60%가량을 역외에서 수입했는데,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후 미국산 무기 유입이 늘어나며 역외 의존도가 80%까지 치솟았다. 아울러 ②2030년까지 역내 방산 거래 규모를 현재의 15%에서 35%로 확대하고, ③새로 사들이는 무기 40% 이상을 공동 구매로 도입하자고도 제안했다.
다만 한계는 있다.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방산 업계에 대한 막대한 투자·지원이 필수적인데, 재원이 부족하다. 지난 1월 EU 집행위는 1,000억 유로(약 145조 원)의 방위 기금이 필요하다고 밝혔으나, 당장 활용 가능한 재원은 15억 유로(약 2조1,721억 원)에 불과하다. 방위산업은 국가 기밀로 분류되기 때문에 회원국들이 이러한 전략에 대한 참여를 꺼릴 수도 있다. EU의 한 고위 외교관은 폴리티코에 "자국의 (군사적) 역량이 박탈당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회원국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