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하나도 겨우 올렸는데... '철도 지하화 공약' 판돈 불리기에 빠진 여야

입력
2024.03.02 17:00
14면



선거철을 맞아 여야가 경쟁하듯이 더 크고 아름다운 규모의 ‘철도 지하화’ 공약을 ‘걸고’ 있다. 마치 투전판을 앞에 두고 ‘묻고 더블로 가!’를 외치는 영화 속 등장인물을 보는 듯하다. 차이점이라면 판돈과 달리 공약은 시간이 지나면 만료되는 채권처럼 아무 위험부담 없이 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십수 년째 선거판의 단골 공약이 된 철도 지하화는 분명 매력적인 제안이다. 유권자를 홀리는 필승법인 ①기피시설 철거와 ②공원·상업시설 등 선호 시설 유치를 통한 지대 상승효과에 얹어 ③대형 토목 공사를 통한 건설 경기 부양과 ④주거지원 정책까지 한 방에 해결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과 같은 공약이다. 이 때문에 ‘000선 지하화를 반드시 이뤄내겠습니다!’는 2000년대 이후 지상철이 지나는 지역 선거구에 출마하는 정치인들의 단골 대사가 됐다.

다음 달 예정된 22대 국회의원 선거를 위해 여당은 주요 도심을 가르는 철도를 지하화해 청년·신혼부부를 위한 공공주택을 지을 것을, 야당은 국철(경부·경원·경의·경의중앙·경인·경춘·전라·호남선)과 서울·광주 도시철도 지상 구간과 광역급행철도 등 사실상 전 노선을 지하화해 주거복합시설과 공원을 지을 것을 약속했다.




이처럼 좋은 공약이 여태 실천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당연 비용 문제다.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자체 산출한 추정 소요 예산은 80조 원 이상으로 4대강 정비사업을 네 번 반복할 수 있는 수준이자 4활주로까지 완공된 인천국제공항을 6개 짓고도 남는 규모다. 반면 여당 측은 자체 산출치를 공개하지 않았다. 여야는 공통적으로 지하로 내려간 철도 부지를 민간이 개발하도록 해 예산부담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국회는 이를 가능케 하는 ‘철도지하화 및 철도부지 통합개발에 관한 특별법’을 지난 1월 찬성 257표, 반대 2표, 기권 3표로 만장일치에 가깝게 통과시켰다.

전면 지하화까지는 아니지만 ‘철도 위에 건물을 올린다’는 발상은 국내에서도 어느 정도 실현됐거나 시도된 적이 있는데 박근혜 정부 시절 철도 상부와 인접 지대를 통합 개발해 올린 ‘행복주택’과 이의 시초 격인 서울주택도시공사의 영구임대주택 ‘양천아파트’다.

양천아파트는 서울 양천구 신정차량기지 위에 올린 단지로 기지를 만들 때부터 함께 계획됐다. 열차가 상시로 고속 운행하는 선로가 아님에도 열차 차고지 전면부 쪽 건물에서는 진동 민원이 수시로 제기된다. 행복주택은 원래 선로 위에 지어질 예정이었지만 소음·진동에 대한 우려와 인공대지 조성 비용 문제로 결국 선로 옆 부지에 지어졌다. 선로 위 공간은 대신 공원 등으로 조성됐는데 지난달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철도 지하화 및 청년 주택 공약을 발표한 구로구 오류동 행복주택이 이 경우다. 2009년 서울 중랑구 망우역 위에도 임대주택단지를 올리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이 역시 사업성 없는 높은 비용과 소음·진동 문제로 백지화됐다.



과거 사례를 보면 기존 철도를 그대로 두고 덱 위 건물만 올리는 데에도 ‘사업성 미달’ 판정이 난 경우가 많았다. 철도 지하화는 ①지하 노선 신설 ②지상 노선 철거 ③유휴부지 개발을 전부 해야 하는 만큼 앞선 사례에 비할 수 없는 규모의 예산이 소요되는데, 이를 뛰어넘는 사업성이 보장돼야 민간 사업자가 투자할 여지가 있다. 공사기간과 난이도도 예산만큼이나 차이가 크다.

여당은 윤석열 대통령 후보 시절부터 약속했던 역점 공약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구체적인 공간계획 수립에 돌입했고, 야당은 한술 더 떠 서울의 간선도로까지 전부 지하화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단 한 개 역 인근 선로를, 지하화하는 것도 아닌 상부만 개발하는 사업도 지난 십수 년간 성공한 사례가 손에 꼽을 정도다. 총선을 주도하는 거대 양당은 건국사상 최대 토목공사가 될 가능성이 높은 사업을 판돈 불리듯이 던지고 있다.




편집자주

무심코 지나치다 눈에 띈 어떤 장면을 통해 우리 사회의 다양한 사연들을 소개하려 합니다. 시선을 사로잡는 이 광경, '이한호의 시사잡경'이 생각할 거리를 담은 사진으로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글·사진= 이한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