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구병모부터 최진영, 이혁진까지. ‘단 한 편의 이야기’를 깊게 호흡하자는 콘셉트로 지난해 3월부터 매달 둘째 수요일마다 단편소설을 낸 위픽 시리즈의 시즌1이 올해 2월로 끝을 맺었다. 정신없이 달려온 1년간 나온 책은 딱 50권. 시리즈의 목표인 100권의 절반까지 왔다. 주변에서도 과연 “매달 4권 이상의 책을 펴내는 것”이 가능할지 의문의 시선을 보냈던 기획이었다.
단편소설은 으레 여러 편을 묶어 ‘소설집’으로 엮어내지만, 출판사 위즈덤하우스는 위픽을 기획하면서 “소재나 형식 등 그 어떤 기준과 구분에도 얽매이지 않기로 했다”고 전했다. 또 웹소설처럼 온라인에서 먼저 연재하고, 완결 이후 책으로 출간해 독자와의 접점을 넓히려 시도했다. 위픽 시리즈의 첫 작품이었던 구병모 작가의 ‘파쇄’도 2022년 11월 출판사 홈페이지와 뉴스레터를 통해 선공개됐다. 이는 구 작가의 장편소설 ‘파과’의 외전으로 주목을 받으며 1만5,000부 이상 팔렸다.
위픽 시즌1의 마지막을 장식한 작품의 면면도 화려하다. 최의택 작가의 ‘논터널링’, 김유담 작가의 ‘스페이스M’, 전삼혜 작가의 ‘나름에게 가는 길’, 최진영 작가의 ‘오로라’, 이혁진 작가의 ‘단단하고 녹슬지 않는’이다. 지난해 소설 ‘구의 증명(2015)’이 역주행 기록을 쓴 최 작가의 ‘오로라’는 21일 출간 직후 온라인 서점 3사의 소설 분야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렸다. “친구가 숙소를 예약하고 오지 못하는 상황이어서” 대신 제주로 간 한 여성이 자신의 이름을 오로라라고 밝히기로 결심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섬세한 문체로 그린 이야기다.
시리즈의 50번째 작품인 이 작가의 ‘단단하고 녹슬지 않는’은 100쪽 안팎으로 시집처럼 얇은 다른 책 사이에서 두 배의 두께를 자랑한다. 상용화 단계에 이른 완전자율주행 자동차가 낸 교통사고를 계기로 “인공지능이 주체, 인간이 객체가 된” 사회에 질문을 던지는 이 소설은 온라인 연재 당시에는 300쪽이 넘었지만, 출판 단계에서 절반으로 줄었고 제목도 바뀌었다. 이 작품뿐 아니라 독자의 반응 등을 고려해 연재분과 분량과 내용이 달라진 단행본이 적지 않다. 심지어 주인공의 나이와 성별을 제외하고 모든 것이 바뀐 작품도 있다.
이제 막 시즌 1이 끝났지만, 위픽 시리즈는 숨돌릴 틈도 없이 이미 시즌 2를 시작했다. 100권의 책을 위한 100명의 작가도 이미 준비되어 있다. 시즌 2의 문을 여는 건 작품을 통해 현실의 서늘함을 그려온 강화길 작가의 ‘영희와 제임스’다. 인디밴드 ‘영희’를 좋아하는 지방의 작은 마을에 사는 소녀들을 통해 언젠가 과거가 되어 사라지고 잊히는 것들을 조명했다. 또 능청스러운 환상을 통해 현실을 꼬집는 임선우 작가의 ‘0000’과 김서해 작가의 ‘라비우와 링과’, 김성중 작가의 ‘두더지 인간’이 연재 중이다.
왜 하필 단편일까. 박태근 위즈덤하우스 출판본부장은 “장편소설은 한 편을 쓰려면 빨라야 2, 3년이 걸린다는 현실적인 한계가 있었다”고 털어놨다. 대신 1년에 50권의 단행본을 펴내기로 한 만큼 속도감 있는 단편을 통해 다채로운 라인업을 펼쳐보기로 했다는 것. 필진으로 소설가뿐 아니라 시인, 가수, 논픽션 작가 등 다양한 장르의 작가를 섭외한 이유다. 소설을 발표한 적 없던 이소호 시인과 싱어송라이터 김목인, 구술생애사 작가로 노년의 삶에 대해 주로 써온 최현숙 등이다.
작가의 폭이 넓어진 만큼 이야기도 풍성해졌다. 안담 작가의 ‘소녀는 따로 자란다’는 소녀도 소년도 아닌 중간자에 있는 ‘나’를 통해 초등학교 여학생들의 성과 욕망이라는 그간 다뤄지지 않은 이야기를 선보이며 각광받았다. 등단한 적 없는 안 작가의 첫 소설인 이 작품은 위픽 온라인 연재 역대 조회수 1위를 기록했다. 박 본부장은 “한국 소설이 전반적으로 (작가가) 등단을 꼭 해야 한다거나 장르를 엄격하게 구분하던 분위기에서 벗어난 점도 영향을 미쳤다”고 귀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