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대 국회에서 국회의원 세비 삭감 관련 법안이 10건 넘게 발의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단 한 건도 제대로 논의되지 않아 이제 폐기 수순을 밟고 있다. 국회의원 특권을 둘러싼 여론이 악화할 때마다 경쟁하듯 관련 법안을 발의하지만,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외면하는 구태가 매번 반복됐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세비 중위소득 연동'을 제안했는데도 아무 반향이 없는 것은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8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21대 국회에서 발의한 세비 삭감 관련 법안은 총 14건이다. 국회 임기가 끝나가지만 이들 가운데 통과됐거나 통과를 앞둔 법안은 한 건도 없다. 5월 임기가 끝나면 자동 폐기된다. 14건 중 13건은 소관 상임위 논의 자체가 없었다. 사실상 법안을 위한 법안이었던 셈이다.
구체적으로 5건은 소위원회 심사 안건으로 상정되지 못했고 9건은 소위원회 테이블에 올랐지만 전혀 논의되지 않았다. 김남국 무소속 의원이 발의한 1건은 소위원회에서 다뤄졌지만 논의라기엔 민망한 수준이다. 회의록을 보면 송언석 운영소위원장이 “(내용을) 정확하게 모르겠다. 사무처에서 자료를 만들어서 다음에 한 번 더 논의하도록 준비해 달라”고 지시한 것이 전부이다.
이후 열린 소위에서 논의된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법안을 냈던 의원들 얘기를 들어봤다. 최근 민주당 탈당을 선언한 박영순 의원은 “내 법안도 논의가 되지 않았다”며 “(위원회에서) 일부러 논의를 안 했다면 직무유기이기에 비판을 받아도 당연하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법안 발의 의원(민주당)은 “여야 간사 간 합의가 잘 안 되는 모양”이라며 “양당 합의가 되면 바로 (통과)될 수 있지만 지금은 워낙 여야 대치 상태라 쉽지 않아 보인다”고 밝혔다. “사실 의원들에게는 약간은 부담스러운 법안”이라고도 했다.
21대 국회 이전에도 세비 삭감 시도는 있었다. 하지만 말뿐이었다. 2016년부터 2020년까지 이어진 20대 국회에서는 △최저임금 5배 범위에서 세비 지급(심상정 의원) △회의 불출석 시 세비 삭감(박주민 의원) 등의 법안이 발의되었지만 전부 임기 만료 폐기됐다. 19대 국회에서도 대선을 앞두고 박지원 당시 민주통합당 대표가 세비 30% 삭감을 당론으로 추진해 법안을 발의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세비 구조조정이 어려운 이유는 당사자인 국회의원이 결정 권한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소관 상임위인 운영위원회에서 예비심사를 마치면 예산결산특별위원회 본심사를 거쳐 본회의에서 최종 의결되는 절차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격이니 제대로 처리될 수 없는 구조다.
이와 달리, 영국의 경우 '의회윤리 심사기구'라는 독립기구가 의원 급여를 결정한다. 이에 우리도 독립기구를 설치해 세비의 투명성을 강화하자는 주장이 끊이지 않았다. 실제로 19대 국회에서부터 독립기구 설치에 관한 법안이 꾸준히 발의됐지만 공염불에 그쳤다. 2018년 정세균 당시 전반기 국회의장은 국회 운영위에 '국회의원 연봉 산정 위원회' 설치를 제안한 바 있지만 회기가 끝나자 흐지부지됐다.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도 지난달 21일 국회 본회의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세비 결정 독립기구를 설치하자고 제안했지만 실현 여부는 불투명하다. 당장 같은 당 한동훈 위원장이 제안한 세비 중위소득 연동과도 충돌하는 내용이다.
선거철이 되면 정치권은 앞다퉈 세비 삭감 공약을 낸다. 정치에 염증을 내는 유권자들의 표를 흡수하기 위해서다. 약속만 하고 선거 이후 이행하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신뢰 회복을 위한 정치 개혁 대신 '일단 깎고 보자'는 식의 주장을 반복하는 건 포퓰리즘이란 지적이 나온다. 이내영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본보 통화에서 "(세비 삭감이) 합의가 될 리 없거니와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며 "세비 문제로 접근하는 게 굉장히 일차원적"이라고 비판했다. 이 교수는 "(국회의) 질을 좋게 만들고 유능하고 깨끗하게 만드는 것이 해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