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동생 밥 챙기다 그만"… '자전거 절도' 고교생 사연에 지원 나선 지자체·경찰

입력
2024.02.25 17:32
"자전거 훔쳤다"며 자수한 고교생 6남1녀 맏아들
벌금 10만원 선고유예 판결, 지자체도 각종 지원

경제적으로 어려운 복지 사각지대에서 힘겹게 여섯 동생들을 돌보느라 남의 자전거에 손을 댄 한 고교생의 사정을 들은 경찰이 해당 지방자지단체와 함께 지원에 나섰다.

25일 오산경찰서 등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20일 경기 오산경찰서 지구대로 찾아온 고등학생 A(16)군은 “이틀 전 집으로 가던 중 아파트 단지 자전거 보관대에 잠금 장치 없이 세워져 있던 자전거 한 대를 타고 갔다”고 자수했다. 이 사건은 자전거 주인 신고로 경찰이 수사에 나서려던 참이었다. 경찰서에 찾아오기 전 A군은 수소문 끝에 주인을 찾아 자전거를 돌려줬다.

A군은 자전거를 훔친 이유에 대해 “평소 친구가 타던 자전거와 비슷하게 생겨 잠시 빌려 타려고 한 것인데, 뒤늦게 다른 사람의 자전거라는 사실을 알고 돌려줬다”며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집에 가다가 빨리 여섯 동생의 밥을 챙겨줘야 한다는 생각에 서두르다가 착각했다”고 진술했다. A군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고깃집에서 집까지는 도보로 약 30분 거리였다. 경제적 어려움 탓에 본인 소유 자전거는 없었다.

사건을 맡은 오산경찰서 여성청소년과는 절도 사건 조사에만 그치지 않고, 만 16세 밖에 안된 A군이 일터로 나가게 된 사정도 살폈다. 조사 결과 A군은 6남 1녀의 다자녀 가정의 장남이었다. 올해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 생계를 위해 집 근처 식당에서 일을 하고, 돈을 벌면 가정에 보태고 동생들에게 용돈까지 건네주는 의젓한 맏이였다.

A군의 부친은 물류센터에서 근무하고, 모친은 심부전과 폐 질환 등으로 투병 중이어서 평소 중학생·초등학생·유치원생·생후 7개월 된 젖먹이 등 6명의 동생은 사실상 A군이 돌봐왔다. 주거 환경도 열악했다. A군을 포함해 9명의 가족이 사는 곳은 46㎡(14평) 국민임대아파트로 공간이 비좁아 공부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A군 부친이 월 소득과 차량이 있어 이 가정은 기초생활수급이나 차상위 등 취약계층 선정 대상에서 빠져 있었다. A군의 부친은 경찰에 “다자녀인 데다가 아내를 병원에 데려가는 일이 많아 차량이 꼭 필요해서 보유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차량 소유 경위를 알렸다.

경찰은 정부 지원망에 비껴나 있는 A군의 가정에 대해 지방자치단체의 도움을 요청했고, 오산시도 즉각 A군의 집을 여러 차례 방문해 가정 형편을 조사했다. 그 결과 오산시, 오산경찰서, 주민센터, 청소년센터, 보건소, 복지기관 등 7개 기관은 지난 6일 통합 회의를 열어 A군 가정에 경제적 지원을 하기로 결정했다. 일단 긴급복지지원(320만원×3개월), 가정후원물품(이불, 라면 등), 급식비(30만원), 주거환경개선(주거지 소독), 자녀 의료비(30만원)·안경구입비(10만원) 제공 등 생활지원에 나섰다. 교육지원으로는 초·중등 자녀(3명) 방과후 돌봄 제공, 중학생 자녀 대상 운동프로그램 제공 및 진로 상담을 검토 중이다. 이 밖에 주거지원책 중 하나로 기존 주택 매입임대제도(최대 8년 임대)가 가능한 지도 살펴보고 있다.

수사기관도 처벌에만 초점을 두지 않았다. 경찰은 자전거 절도에 대해 11일 선도심사위원회를 열어 즉결심판 처분을 내렸다. 사건을 넘겨 받은 법원도 벌금 10만 원의 선고를 유예했다. 선고유예는 가벼운 범죄에 대해 일정 기간 형의 선고를 미루고, 유예일로부터 2년이 지나면 없던 일로 해주는 판결이다. 서영희 오산경찰서 여성청소년과장은 “A군이 앞으로 중장비 관련 기술을 배워 부모를 도와 동생들을 잘 보살피겠다는 말을 전해왔다”며 “어린 나이에도 자신을 희생하면서 어린 동생들을 돌보는 A군이 잘 성장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종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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