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일 해도 월급은 절반'… 초고령사회 일본 ‘65세 정년’의 실상

입력
2024.02.26 04:30
14면
원하면 65세까지 고용할 의무
60세 이후 임금 절반 이상 삭감도
"한국과 일본 노동 시장 차이 커"

편집자주

일본은 한국의 '미래의 거울'이란 말이 있습니다. 저출생·고령화처럼 일본이 먼저 겪은 사회·경제적 현상이 시차를 두고 한국에도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죠. 한국에서 주목하고 알아둬야 할 일본 구석구석의 이야기를 도쿄특파원이 3주마다 들려드립니다.


지난 16일 오후 6시 퇴근하는 직장인으로 가득 찬 일본 도쿄 지하철 니혼바시역. 환승할 노선의 승강장을 향해 급하게 발을 옮기는 회사원 중엔 백발이 성성한 고령자가 자주 눈에 띄었다. 패밀리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유명 외식업체에서 근무하다 12년 전 퇴직하고 급식 회사로 이직했다는 사토(67)가 취재에 응했다.

그의 이직 이유는 새 회사에선 원하면 70세까지도 일할 수 있어서다. 월급은 전보다 줄었지만 65세 때부터 연금을 받고 있어 경제 사정에는 큰 문제가 없다. 그는 “주말에 확실히 쉬고 일도 전보다 수월해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다”며 “오히려 집에만 있는 것보다 건강에 좋다”고 말했다.

일본에는 사토처럼 60세가 넘어서도 계속 일하는 고령 노동자들이 많다. 총무성 통계에 따르면 2022년 일본 65세 이상 취업자 수는 912만 명에 달했고, 취업자 중 고령자 비율은 13.6%로 역대 최고치였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지난해 10~11월 실시해 이달 18일 발표한 여론조사에선 ‘몇 살까지 일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70세 이상’을 선택한 응답자가 39%로, 2018년 조사 개시 이래 가장 높았다.

내년이면 65세 이상 인구 비중이 20%를 넘는 ‘초고령사회’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되는 한국에서도 최근 들어 일본의 정년 제도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현지에서 살펴본 일본 고령자 고용 제도의 실상은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고 있었다.


희망 직원 모두 65세까지 고용 의무

일본은 1986년 개정된 고령자고용안정법을 통해 정년 제도를 규정하고 있다. 정년 연장 논의는 1970년 일본이 ‘고령화사회(65세 이상 7%)’에 진입한 뒤부터 시작됐으나, 60세 이상으로 정년을 높이도록 법으로 의무화한 것은 ‘고령사회(65세 이상 14%)’가 된 1994년에 이르러서였다. 2007년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일본은 희망하는 직원은 모두 65세까지 고용해야 하는 의무를 2013년부터 기업에 부과했다.

다만 60세 정년제와 달리 65세까지 고용을 유지해야 하는 의무는 반드시 정년 자체를 65세까지 연장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정년은 60세로 유지하되 일단 퇴사한 후 임금을 낮추고 계약직으로 다시 고용하는 ‘계속 고용’ 방식도 허용했다. 2022년 기준 상시 근로자 21인 이상 일본 기업의 99.9%가 65세까지의 고용 확보 조치를 실시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70.6%의 기업이 '계속 고용'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새로운 제도를 도입할 때마다 일본 정부는 먼저 일정 기간 기업에 ‘노력할 의무’를 지게 한 뒤, 상당 기간이 지난 후 법적 의무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단계적 시행 절차를 거쳤다. 일본은 2021년부터는 65세 이상 직원도 원하는 경우 70세까지 취업 기회를 확보하도록 노력할 의무를 새롭게 부과했다.

'저성과자도 끝까지 고용' 기업 부담

'65세까지 고용 의무'는 나이가 들어서도 일정한 수입을 얻으며 계속 일하고 싶어 하는 노동자에게 좋은 제도다. 정부 입장에서는 연금이나 건강보험 등 복지 비용이 감소해 재정 측면에서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고령 노동자를 능력이나 성과와 무관하게 모두 계속 고용하는 데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글로벌 헬스케어 업체 일본 법인의 한 임원은 “사무직 직원 중 성취 동기가 없어 생산성이 매우 낮고, 승진도 기피하면서 정년까지 일하는 고령자들이 상당수 존재한다”며 “그래도 원하면 65세까지 계속 고용해야 하니 회사의 활력이 떨어지고 젊은 직원의 업무 역량 향상에도 장애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문제에도 일본 재계가 정년 후 재고용 의무를 수용한 것은 젊은 층 인구 부족에 따른 심각한 인력난 때문이다. 주택 설비 제품 전시 쇼룸을 전국 80여 곳에서 운영 중인 A사의 인사·노무 담당 책임자는 “고령자 의무고용 제도가 인재 부족 해소에 일조하고 있다”고 말했다. 직원 수 1,500명 정도인 이 회사는 60세 정년이 되면 일시 퇴사 후 원하면 계약직으로 재고용하는 제도를 운영 중이다.

이 담당자는 ‘65세까지 계속 고용해야 하는 의무 때문에 젊은 직원을 고용할 여력이 부족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인구가 줄어 젊은 직원을 고용하는 것 자체가 힘들다”고 답했다. 오히려 “경험이 풍부한 60세 이상의 인재가 쌓은 노하우나 인맥 등이 계속 유지되니 좋다”고 말했다.


퇴사 전 유사 업무인데 월급 대거 삭감

일본 정부가 ‘계속 고용’ 방식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한 것도 재계가 이 제도를 수용한 큰 이유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는 직원 입장에서는 ‘나이에 의한 역차별’로 작용한다. '계속 고용' 계약을 할 때 조금 더 수월한 업무로 바뀌는 경우도 있지만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경우가 많다. 같은 일을 하는데도 월급이 큰 폭으로 깎이면 부당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실제로 2021년 주간 ‘닛케이비즈니스’가 60세에 정년을 맞이한 뒤 계속 고용을 선택한 고령 노동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이전과 비슷한 일을 하면서도 월급은 40% 이상 크게 깎이는 실상이 드러났다. 응답자의 거의 절반이 근무 시간(63.5%)과 업무량(47.9%)이 ‘정년 전과 같은 수준’이라고 답했지만, 급여 수준은 ‘정년 전의 60% 정도’라는 응답이 20.2%로 가장 많았다. ‘50% 정도’가 19.6%, ‘40% 정도’가 13.6%로 뒤를 이었다. 3명 중 1명은 급여가 절반 이상 대폭 삭감된 것이다.

다만 최근에는 임금 삭감으로 직원의 업무 의욕이 크게 저하되는 것을 막으며 추후 소송 가능성 등에 대비해 임금을 크게 삭감하지 않고 60세 퇴직 때 수준으로 유지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변경하는 기업도 나타나고 있다.

"신입사원보다 월급 낮아" 소송도

실제로 급여가 지나치게 깎인 노동자가 소송을 제기한 경우도 있다. 대표 사례가 ‘나고야 자동차학교’ 소송이다. 나고야의 운전학원에서 1976년부터 정직원으로 근무하고 2013년 정년을 맞은 직원들이 퇴사 후 ‘계속 고용’을 택했는데, 월 기본급이 퇴직 당시 임금(18만1,640엔·약 160만 원)의 60%에도 못 미치는 8만1,738엔(약 72만 원)에 불과했다. 이들은 같은 노동을 하는데 신입 직원보다도 낮은 임금을 받는 것은 ‘정사원과 비정규직 간 비합리적인 수준의 임금 격차’를 금지한 현행법을 위반하는 것이라며 배상을 요구했다.

1, 2심은 ‘정년 전의 60%도 안 되는 임금을 준 것은 세상 수준을 크게 밑도는 비합리적인 격차’라며 60%를 밑도는 부분에 대해 배상을 명했다. 노동자 측의 요구를 일부 수용한 형태지만, 이 판례를 악용해 '계속 고용' 시 임금을 40%씩 깎는 기업도 생겨났다. 그러자 지난해 7월 최고재판소(한국의 대법원)는 1, 2심의 판단 근거가 미흡하다며 파기 환송했다. 최고재판소의 판단이 노동자와 기업 중 어느 쪽에 유리하게 작용할지 불확실한 가운데 많은 일본 기업은 파기환송심에 주목하고 있다.


"한일, 노동시장·법·제도 달라"

한국에서 일본의 고령자 고용 제도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한국과 일본의 노동 시장 현황이나 법, 제도에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을 간과하면 안 된다고 지적한다. 심승규 아오야마가쿠인대 국제정치경제학 교수는 "임금피크제가 ‘나이에 의한 차별’에 해당돼 위법 판단을 받은 한국 상황에서 재고용 후 임금 대거 삭감은 ‘동일 노동 동일 임금’ 원칙에 반하는 위법 요소”라고 설명했다. 심 교수는 또 “일본 대기업은 인재 파견용 자회사를 만들어 놓고 60세 정년이 되면 퇴직 후 이 자회사에 입사시켜 재고용하는 방법도 많이 사용한다”며 “한국 현행법으로 보면 불법 파견에 해당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무엇보다 공기업이나 공공기관을 제외하면 정년까지 일할 수 있는 회사가 매우 적고, 청년 실업 문제가 심각한 한국의 노동 시장 현실은 일본과 매우 다르다는 지적도 있다.

일본 대기업은 50대 후반 더 이상 승진하지 않으면 부장 또는 과장직을 내려놓는 ‘역직(役職) 정년’이라는 제도를 운영한다. 이때 직책 수당이 크게 삭감되지만 정년은 보장된다. 반면 한국은 일본의 역직 정년에 해당되는 나이에 아예 회사를 떠나는 경우가 많다. 심 교수는 또 “대학 3학년 때 이미 취업처가 정해지는 일본은 채용 시장이 구직자 우위”라며 “청년 실업이 심각한 한국에선 고령 노동자의 정년 연장이 청년 일자리를 줄이지 않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도쿄= 최진주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