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 소재 대학병원의 A 간호사는 전공의 집단사직 이후 병원에서 이런 공지사항을 받았다고 한다. 이 외에도 약물 처방, 각종 동의서 작성, 삽관(튜브를 몸 안에 넣는 것) 등 의사들이 하던 업무마저 간호사가 맡으라는 지침이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전공의들이 단체로 떠난 종합병원에서 간호사들은 '의료법 위반' 딱지가 붙을 수도 있는 일에까지 동원되며 책임을 떠안는 중이다. 현장 간호사들은 "파업은 의사가 하는데, 그 손해는 간호사를 비롯한 다른 직원이 감수하냐"며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22일 의료계에 따르면, 한 수도권 대학병원은 19일 전공의 파업이 가시화되자 업무조정안을 내렸다. △삽관 교체 및 제거 △채혈 및 검사 △드레싱 △식사 처방 등 의사가 하던 업무 일부가 간호사의 몫으로 지정됐다. 다른 대학병원 20년 차 간호사는 "혈중산소포화도를 보기 위해 동맥에서 피를 뽑아야 하는 검사를 수간호사나 진료지원(PA·Physician Assistant) 간호사에게 맡긴다"며 "위험성이 있어 숙련된 의사가 해야 하는데, 환자들이 밀려있다 보니 불법이어도 어쩔 수 없이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정맥 채혈은 의사 외에 임상병리사도 할 수 있지만, 동맥혈 채혈은 저절로 지혈이 되지 않는 위험성 등이 있어 의사만 할 수 있는 업무다.
보건의료노조는 20일 성명을 내고 "의사들의 집단 진료중단으로 응급상황 발생 시 심폐소생술 대처, 긴급 투약 등 병원 내 응급상황 대응체계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아 환자 생명이 위험하게 될 우려가 높다"고 발표했다. 예컨대 코로 음식을 주입하는 엘튜브(L-Tube) 삽관이나 남성 환자들의 소변줄을 꼽는 일 역시 원래 인턴의 일이지만, 간호사에게 떠맡겨지기 일쑤다. B 간호사는 "의료 사고가 발생하면 내가 책임져야 할까 걱정된다"고 밝혔다. 주말 당직 교수가 나오지 않고 전화로만 지시한다는 경우도 적잖다.
삼성서울병원 4년 차 간호사인 C씨는 "병동 담당 주치의가 없으니 환자가 좀만 안 좋아져도 중환자실로 냅다 보내는 등 업무과중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업무도 복잡해졌다. 그는 "야간 당직 때 인턴에게 말하면 됐던 일도 이젠 ①간호사가 담당 교수에게 전화한 뒤 ②담당 교수가 야간 당직 교수에게 전달하고 ③야간 당직 교수가 직접 와서 처치를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환자 동반 업무도 간호사들의 몫이 됐다. 중환자실의 경우 환자들이 검사나 시술을 할 때 의료진이 동반해야 하는데, 인턴이 아닌 간호사가 해야 한다는 것이다. C씨는 "15~30분간 동반하러 간 시간 동안 내가 맡은 환자들은 어떡하냐고 물으니, 동료 간호사들이 봐주라는 말을 들었다"며 "내가 맡은 환자가 잘못되면 내 책임인데 숨이 턱 막혔다"고 말했다.
강제로 개인 연차를 쓰게 하거나 업무를 바꾸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한 대형병원 6년 차 간호사는 "입원 환자가 줄다 보니 급작스럽게 오프를 쓰라고 하고, 안 쓰겠다 하면 다른 병동으로 업무 지원을 가라고 (관리자가) 협박하기도 하니 연차가 낮은 간호사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쓰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작년 간호사들이 현장을 지키며 간호법 목소리 낼 때는 의사들이 비난하더니, 지금은 의사가 떠난 자리에서 우리가 그 일을 하고 있다"며 분노했다.
대한간호협회는 20일 오후 6시부터 홈페이지를 통해 의료 공백으로 인한 현장 간호사들의 애로사항 신고센터를 운영하고 있는데, 이날 오전 9시 기준 119건의 신고가 접수됐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