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동 배아를 생명으로 인정한 미국 앨라배마주(州) 대법원 판결의 후폭풍이 거세다. 시험관 임신 시술을 시도하는 난임 부부 수백만 명과 의료계는 패닉에 빠졌다. 오는 11월 미국 대선의 최대 쟁점으로 꼽히는 임신중지 이슈로도 논란의 불길이 옮겨붙을 기세다.
21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앨라배마주가 주대법원의 '냉동 배아' 판결 이후 충격과 분노, 혼란에 사로잡혔다"고 보도했다. 당초 '배아는 생명으로 볼 수 없다'고 했던 하급심 판결을 지난 16일 주대법원이 뒤집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기존 시험관 시술 과정에서처럼 임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다수의 배아를 만들어 냉동 보관한 뒤, 임신 성공 시 폐기하면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게 됐다.
형사 기소 우려에 시험관 시술을 중단하는 병원도 실제로 나왔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미국 내 상위 20대 병원에 속하는 버밍엄병원은 "난임 여성의 난자 채취는 계속하지만, 수정과 배아 배양·이식을 일시 중지한다"고 이날 밝혔다.
문제는 배아를 냉동 보관하지 않을 경우, 난임 부부로선 더 많은 돈과 시간을 들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시험관 임신 시도 때마다 난자를 새로 채취해 수정해야 하는 탓이다. 동결 대신 한 번에 여러 개 배아를 착상시켜 둘 이상의 태아(다태아)를 임신하면 모체와 태아 모두의 건강상 위험이 커진다.
시험관 시술로 임신한 오드라 스타크(40)는 "(2022년 6월 연방대법원의 임신중지권 폐기 판결 이후) 각 주에서 임신중지를 제한했듯, 미국 전역에서 시험관 시술을 시도할 수 없게 될 것 같다"며 "도미노처럼 무너질까 봐 무섭다"고 WP에 말했다. 전미난임협회에 따르면 매년 난임으로 어려움을 겪는 미국인은 수백만 명인데, 이들 가운데 6명 중 1명은 시험관 시술을 이용한다.
당장은 앨라배마주에만 국한되지만, 보수색이 짙은 다른 주가 앨라배마의 선례를 따를 가능성도 크다. WP는 "임신 초기 단계 유기체에 처음으로 인격권을 부여한 판결"로 "생식권을 둘러싼 논쟁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짚었다.
사실상 생명의 시작을 배아 수정 시점으로 간주했다는 점에서, 임신중지 문제도 함께 부상했다. 미국 사회에서 현재 가장 폭발력이 큰 이슈를 둘러싼 논란이 재점화한 것이다.
먼저 포문을 연 건 공화당 대선 주자인 니키 헤일리 전 주유엔 미국대사다. 그는 NBC방송 인터뷰에서 "배아는 아기다. 나에겐 생명"이라며 앨라배마 대법원 판결을 지지했다. '배아 폐기도 살인'이라고 주장해 온 복음주의 기독교 등 강경 보수층도 이에 가세했다.
그러나 공화당 셈법이 더 복잡해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여성 유권자뿐 아니라 임신중지에는 반대하지만 시험관 시술은 지지하는 수백만 명이 있다"며 "공화당에는 '또 다른 뜨거운 감자'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유대교와 유니테리언교 등 다른 종교계도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생명은 출생 이후 시작'이라고 보는 이들 입장에서 이번 판결은 기독교적인 해석을 법으로 강요하는 것이다. 특히 톰 파커 앨라배마주 대법원장은 보충의견에서 성경을 인용해 반발을 사기도 했다. 앨라배마주 최대 난임 클리닉의 전문의 매미 맥클레인은 "이번 판결은 의학에 근거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카린 장-피에르 백악관 대변인은 20일 "우리는 연방대법원이 (임신중지권을 인정한) '로 대 웨이드' 판례를 폐기해 가족들이 내려야 할 가장 사적인 결정들을 정치인들이 명령하도록 했을 때 이런 종류의 혼란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