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지 않게 오셔서 다행이네요, 이제 ‘의료 대란’인데….”
지난 주말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암환자 안모(30)씨에게 주치의가 20일 오전 회진에서 가장 먼저 건넨 말이다. 의료 대란은 이날 오전 6시를 기해 시작된 대형병원 전공의들의 업무 중단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10년 정도 입원과 통원을 반복하며 이 병원에서 치료받은 안씨는 주치의 말에 안도감보다 막막함만 더 커졌다. ‘다음’을 기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암환자들은 정기적으로 약물치료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전공의 파업이 지속되는 동안 입원 일정을 어디서 알려주는지, 메토트렉세이트(MTX)처럼 일반약국에서 구할 수 없는 항암제의 투입 주기는 어떻게 조정되는지 물어도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서울대·세브란스·삼성서울·서울아산·서울성모병원 등 이른바 ‘빅5’ 병원 전공의들이 병원을 떠난 첫날, 우려한 ‘의료 마비’ 사태까지 치닫지는 않았다. 하지만 현장 곳곳에서 혼란이 속출하는 등 ‘공백’은 뚜렷이 느껴졌다. 파업이 길어질수록 공백을 넘어 대란, 마비까지 가는 건 시간문제다. 환자들의 불안감도 덩달아 커지고 있다.
빅5 병원에 소속된 전공의는 2,745명으로 전날 1,000명 이상이 사직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각 병원은 지난주부터 급하지 않은 수술과 진료를 연기하는 등 비상체제에 돌입하고 만반의 준비를 했으나, 인력 부족으로 인한 환자 피해를 잠재우기엔 역부족이었다.
엿새 전 대동맥 파열로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응급 수술을 받은 뒤 입원한 어머니를 간병 중인 조모씨(31)는 이날 퇴원 일자가 이틀 뒤로 앞당겨졌다는 병원 측 통보를 받았다. 전날까지만 해도 ‘다음 주 중, 빠르면 주말’이었는데, 하루 만에 별다른 설명 없이 뒤집힌 것이다.
전공의 파업 여파는 또 있었다. 조씨는 “파업 이후 ‘코드블루(심정지 등 긴급상황)’가 두 차례 발생했는데 의사들이 한참을 나타나지 않았고, 전공의 몫인 드레싱도 간호사들이 도맡는다”고 했다. 일상적인 의료 조치마저 삐걱대고 있는 셈이다.
같은 병원 산부인과는 마취통증의학과 전공의 부족으로 전날부터 출산 시 무통주사가 불가하다는 통보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산모는 온라인커뮤니티에 “헌혈이 필요한 고위험 산모인데, 수술이 갑자기 앞당겨졌다”며 불안감을 토로했다.
경각을 다투는 응급실 상황은 훨씬 심각했다. 이날 서초구 서울성모병원을 찾은 임모(53)씨는 응급실 앞에서 눈물을 터뜨렸다. 폐렴으로 입원한 장모의 병세가 갑자기 악화돼 경기지역 병원이 “여기선 손쓸 방도가 없다”며 이곳으로 보냈는데, 병원 측은 “현재로선 환자를 받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며 명확한 답변을 피했다. 임씨는 “이렇게까지 (파업)해야 되나 싶다. 너무 걱정이 된다”며 울먹였다.
파업을 예상해 예약을 미룬 탓인지 그나마 외래 진료의 사정은 나아 보였다. 다만 첫날뿐이다. 엉덩이뼈를 다쳐 3년째 서울대병원에서 통원 치료를 받는 지동욱(63)씨는 진료를 보고 오히려 근심이 깊어졌다. 성형외과 앞에 대기 중인 환자가 2명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지씨는 “평소 10명 넘게 기다리는데, 환자를 안 받는 게 실감이 났다”며 “(다음 진료 때) 이번만큼 운이 좋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실제 2주 후로 잡힌 그의 다음 진료에는 ‘변동이 있을 수 있다’는 단서가 달렸다.
19일 기준 전국 100개 수련병원에서 전공의 6,415명이 사직서를 제출했다. 전체의 절반을 넘는(55%) 수치다. 이대로라면 비상진료 체제를 가동해도 최장 3주를 버티기 힘들다는 보건복지부 추산까지 나왔다. 정부와 의료계가 확실한 타협점을 찾지 않는 한 전공의 집단행동에 따른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밖에 없다는 경고음이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