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항쟁, 삼청교육대, 형제복지원.
한국 현대사의 굴곡마다 정당한 이유 없이 연이어 붙잡히며, 국가로부터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당했던 60대가 정부로부터 뒤늦은 배상을 받을 수 있다는 판결이 나왔다. 당시 20대였던 꽃다운 청춘이 위법적 공권력으로 받은 피해를 인정받고 명예를 회복하기까진 40여 년이 걸렸다.
16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913단독 이세창 부장판사는 A씨가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14일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법원은 “정부는 A씨가 청구한 5억 원 중 3억 원과 이에 대한 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A씨는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79년 10월 17일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부마(부산ㆍ마산)항쟁에 참여했다. 당시 부산 중구 국제시장 근처에서 열린 시위에 나갔다가 붙잡혔고, 불법 시위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구류형을 선고받은 뒤 같은 달 말 풀려났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듬해 7월 경찰은 느닷없이 들이닥쳐 A씨를 삼청교육대로 끌고 갔다. 삼청교육대는 신군부 집권 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사회정화 명목으로 군부대 내에 설치한 기관이었다. A씨는 조직폭력배 등 삼청교육대 수용 대상과 거리가 멀었지만, 한 달간 ‘순화교육’을 받고 나서야 퇴소할 수 있었다. 물론, 순화교육의 실체는 가혹행위였다.
그의 불행은 이어졌다. 1983년 10월부터 12월까지, 다음 해 1월부터 10월까지, 다시 11월부터 1986년 10월까지 3년간 국가폭력으로 악명 높은 부산 형제복지원에 3차례나 수용됐다. ‘부랑아’로 낙인찍혀 담벼락 보수공사 작업장, 운전면허 소대, 울산 운전교습소 작업장 등을 전전하며 온갖 노역에 시달리던 그는 1986년 10월 19일에서야 탈출에 성공했다.
7년에 걸친 악몽 같은 현실은 그에게 씻기 힘든 상처를 남겼다. 1988년 1월 28일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고 다음 해 4월 13일까지 입원치료를 받았다. 언제든 누군가 자기를 해칠 수 있다는 두려움은 ‘가족이 건넨 음식에 독약이 들어있다’는 망상으로까지 이어졌다. 평범한 청년과 가족의 삶은 피폐해져 갔다.
그랬던 A씨가 명예를 되찾게 된 건 과거 국가폭력에 대한 진상규명 움직임이 본격화되면서다. 2021년 5월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 및 관련자 명예회복심의위원회’가 A씨의 피해를 처음 인정했고, 이듬해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선 삼청교육대 피해자 진실규명 결정과 형제복지원 피해자 진실규명 결정을 잇달아 받게 됐다.
A씨 사건을 심리한 1심 재판부는 A씨에 대한 불법 구금과 삼청교육대∙형제복지원 수용은 “공권력의 위법한 직무행위”라고 결론 내렸다. 재판부는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국가의 거듭된 불법행위에 의해 평범한 20대 청년이었던 원고와 가족이 겪었을 육체적·정신적 고통은 상당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법원은 지난해 12월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책임을 처음 인정한 뒤 지난달 31일에도 재차 국가 배상 판결을 내렸다. 법무부는 두 판결에 모두 불복해 항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