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르겐 클린스만 전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이 선수 시절부터 이어진 한국과의 악연을 끝내 청산하지 못하고 16일 지휘봉을 내려놨다. 1994년 미국 월드컵 조별리그 C조 최종전에서 그림 같은 터닝슛으로 한국의 16강 진출을 무산시켰던 그는 30년 후 '무전술'과 '무책임' 감독으로 한국 축구에 다시 한번 비수를 꽂았다.
예견된 사태였다. 그는 지도자 데뷔 후 줄곧 '전술부재'와 '재택근무'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녔다. 스스로도 이 같은 논란을 잘 알고 있었다. 지난해 3월 9일 대표팀 감독 취임 일성으로 "아시안컵 우승이라는 목표를 갖고 있고, 결과로 평가받겠다", "나는 한국 대표팀 감독이라 (한국에) 상주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강조할 정도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클린스만 전 감독은 두 가지 모두 지키지 못했다. 감독 부임 후 6개월간 한국에서 보낸 시간은 고작 67일에 불과했고, 이에 대한 비난이 쇄도하자 미국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줌(Zoom)으로 기자회견을 열어 "대표팀 감독의 업무는 국제적인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어 "한국 사람들이 일하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나도 일하기를 좋아한다"는 엉뚱한 말도 덧붙였다.
하지만 그는 미국 스포츠전문 매체 ESPN에 출연해 메시의 활약상을 평가하고, 해리 케인의 바이에른 뮌헨 입단과 엔도 와타루의 이적을 분석하는 등 '한국 대표팀 감독의 일'과는 거리가 먼 비상식적인 행태를 일삼았다. 이뿐만 아니다. A매치 도중 자신이 선수 시절 몸담았던 바이에른 뮌헨 자선경기에 출전하려다 논란 끝에 취소하기도 했다.
64년 만의 우승을 목표로 했던 아시안컵 여정도 졸전으로 마무리 지었지만, 사죄나 반성은 없었다. 도리어 "4강에 진출했다는 건 상당히 긍정적"이라며 실패를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을 향한 비판과 경질 여론에 대해선 "이러한 감정적인 부분도 축구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희로애락의 일부"라며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했고, 재택도 이어가겠다는 '소신 발언'을 했다. 급기야 15일 열린 대한축구협회 국가대표팀 전력강화위원회에선 경기력 부진을 선수들 탓으로 돌렸다.
선수와 감독 시절 모두 한국에 아픔을 건넨 그의 축구 인생을 '이달의 스포츠 핫 피플'에서 훑었다.
①선수 클린스만: 전천후 스트라이커이자 '악명 높은 다이버'
선수 클린스만은 독일을 대표하는 전천후 스트라이커로, 독일 분데스리가 바이에른 뮌헨뿐 아니라 이탈리아 세리에A 인터 밀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토트넘 등 유럽 주요 클럽에서 전성기를 보낸 슈퍼스타였다.
클린스만은 VfB슈투트가르트에 몸담았던 1984~89년에 매 시즌 15~19골을 넣는 기염을 토하며 5시즌 동안 156경기에 출전해 79골을 기록했다. 19골을 넣은 1988년에는 분데스리가 득점왕에도 올랐다. A매치에서도 108경기 47골로 독일 대표팀 역대 최다 득점 4위에 올랐고, 세 차례 월드컵에서 총 11골을 넣어 '금발의 폭격기'라 불렸다.
1990 이탈리아 월드컵과 1996 잉글랜드 유럽축구선수권(UEFA 유로) 대회에선 팀을 우승으로 이끌어 자국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특히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독일과 악연이었던 네덜란드를 상대로 클린스만이 선제골을 넣은 뒤 2-1 승리를 거두자 현지 언론들의 극찬이 쏟아졌다. 독일 주요 일간지 주드도이치 차이퉁은 "최근 10년간 독일에서 이처럼 완벽한 성과를 보인 공격수는 없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경기로 클린스만은 '다이버'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도 얻었다. 해당 경기에서 상대 수비수 페드로 몬손은 클린스만에게 거친 태클을 걸었다는 이유로 퇴장당했는데, 사실은 심판이 클린스만의 할리우드 액션에 속았다는 게 축구계 정설이다. 이 때문에 1994년 토트넘 이적 당시 상대팀 팬들은 경기장에 다이빙 점수판을 가져와 그를 조롱했고, 현지 언론은 "내가 클린스만을 싫어하는 이유"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며 그의 할리우드 액션을 비꼬았다.
그러나 클린스만은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데뷔전에서 강력한 헤더 골을 넣은 뒤 그라운드에 미끄러지는 다이빙 세리머니를 펼치는 '멘털 갑'의 모습을 보이며 자신을 향한 조롱을 받아쳤다. 이후 클린스만은 토트넘에서 한 시즌 41경기에 나서 21골을 터뜨리며 스타로 떠올랐고, 여러 클럽을 거쳐 1998년 다시 토트넘으로 돌아왔을 땐 자신을 전설로 각인시켰다. 클린스만은 당시 강등권에 몰린 토트넘에 합류해 잔여 6경기에서 모두 골을 넣으며 극적으로 팀의 1부 리그 잔류를 이끌었다.
②감독 클린스만: 괄목할 성과와 함께 이해 못할 행보로 빈축
2003년 미국 오렌지 카운티를 끝으로 화려한 선수생활을 마감한 클린스만은 2004년 독일 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하며 지도자로 발돋움했다. 당시 독일 대표팀은 유로 2004 조별리그에서 탈락해 '녹슨 전차'라는 비아냥을 한 몸에 받았는데, 이런 와중에 감독 경험이 없는 클린스만을 대표팀 사령탑으로 선임하는 것에 대한 우려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클린스만은 굴하지 않았다. 그는 "혁신만이 살길"이라며 신예를 대거 발굴하는 등 과감한 세대교체를 실시했다. 올리버 칸 대신 옌스 레만을 주전 골키퍼로 내세운 데 이어 루카스 포돌스키, 필립 람 등 새로운 얼굴로 대표팀을 채워 나갔다. 이뿐만 아니라 이들이 미하엘 발락, 미로슬라프 클로제 등 기존 선수들과 어울릴 수 있도록 분위기를 잘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 결과 독일 대표팀은 2006년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3위에 올랐다. 바닥까지 떨어졌던 독일 전력을 감안하면 기대 이상의 성과다. 이때가 그의 지도자 경력의 정점이었다.
클린스만은 2011년 미국 대표팀을 맡아 2013년 북중미 골드컵 우승, 2014년 브라질 월드컵 16강 진출 등의 성과를 냈으나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예선에서 부진으로 경질됐다.
클린스만의 대책 없는 무전술에 대한 비판은 감독 초창기 시절부터 거셌다. 클린스만이 직접 발굴한 필립 람은 자서전 '미묘한 차이'에서 "클린스만 밑에선 사실상 체력 단련만 했을 뿐"이라고 폭로했다. 그는 "전술적인 지시는 거의 없었고 선수들은 경기 전 우리가 어떻게 경기를 하고 싶은지를 토론하기 위해 알아서 모여야 했다"고 적었다. 실제 클린스만이 독일 대표팀 감독으로 재직할 당시 전술은 수석 코치인 요아힘 뢰프가 도맡았다는 일화는 이미 유명하다. 뢰프는 당시 능력을 인정받아 15년간 독일 대표팀을 이끌었다.
재택근무 논란도 독일 대표팀 감독 재임 시절부터 불거졌다. 이때도 독일보다 가족들이 있는 미국에 더 오래 머물다 보니 독일 축구의 레전드인 고 프란츠 베켄바워가 "독일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코치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며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선수 시절 대표팀 동료였던 로타어 마테우스는 클린스만을 향해 "툭하면 캘리포니아로 날아간다"며 악평을 쏟아내기도 했다.
클린스만의 프로 무대에서의 감독 경력은 딱히 내세울 것도 없었다. 독일 헤르타 베를린에서는 겨울 이적시장에 막대한 금액을 써놓고 약 2개월 만에 개인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깜짝 사임을 통보하고 '야반도주'하는 기행을 벌이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방식을 취했다. 그는 16일 축구협회의 공식 경질 발표에 앞서 자신의 SNS를 통해 결별 인사를 대신했다.
③한국과의 악연: 한국 축구에 큰 상처만 남기고 떠나
클린스만 전 감독은 현역 시절 국내에서도 제법 인기 있는 선수였다. 하지만 1994 미국 월드컵을 계기로 악연이 시작됐다. 클린스만 전 감독은 한국과의 조별리그 최종전에서 전반에만 두 골을 몰아치며 3-2 승리를 이끌었고, 한국은 결국 16강 진출에 실패했다.
'감독 클린스만'이 한국에 남긴 좋은 추억도 있다. 그는 2004년 독일 대표팀을 이끌고 방한해 한국 대표팀에 1-3으로 패했다. 당시 독일은 2002 한일월드컵 준결승전에서 한국을 꺾었던 발락, 클로제, 칸 등 최정예 멤버를 대거 출전시키고도 완패했다. 돌아보면 해당 경기야말로 클린스만 전 감독의 무능함을 감지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였다.
잠깐의 기쁨을 안겼던 클린스만 전 감독은 결국 한국 축구에 큰 상처를 남기고 떠났다. 지난 11개월간 대표팀은 전례 없이 사분오열됐고, 역대 최강 멤버로도 아시안컵 우승을 이뤄내지 못했다. 한국과 클린스만 전 감독의 질긴 악연은 드디어 끝났지만, 한국 축구는 2026 북중미 월드컵 예선을 앞두고 표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