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불법 승계' 혐의를 심리한 1심 재판부는 5일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경영권 강화 목적이 있었음을 인정하면서도 "불법은 아니다"라고 결론 내렸다. 특히 박근혜 정부의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삼성 합병에 찬성하도록 국민연금공단을 압박해 실형 확정 선고를 받았음에도, 이 회장 1심은 "삼성의 로비가 없었다"고 판단했다.
정부가 국민연금을 압박해 사기업 합병을 찬성하라고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 대법원에서 인정됐는데, 정작 해당 기업의 로비는 없었다는 논리가 가능할까. 당시 삼성의 승계 협조의 대가로 법원에서 인정된 뇌물 액수가 86억8,000만 원인데, 어떻게 불법 승계가 아니었다는 판결이 나온 걸까. 대법원 판결과 병립할 수 없어 보이는 1심 판결이 나온 이유를 풀어보기 위해, 한국일보는 1,614쪽 분량의 판결문을 통해 이 회장 1심 재판부가 해석한 ①합병의 목적 ②대법원 판례의 의미 ③국정농단 사건과의 연관성을 따져봤다.
이 회장 1심 판결문을 보면, 재판부는 물산∙모직 합병이 '총수 일가의 경영권 승계만을 위한 약탈적 합병'이라는 검찰의 기본 가정부터 깨고 시작했다. 이 부분에만 222쪽을 할애한 재판부는 합병이 △물산과 모직이 직접 추진한 것이고 △물산의 경영위기 극복을 위한 목적이 분명하며 △이 회장 측이 삼성그룹 지배구조 강화를 위해 검토한 여러 대안 중 하나였다는 점을 조목조목 짚었다.
특히 검찰이 공소사실을 뒷받침하기 위해 들고 나온 '국정농단 판례'에 대해 재판부는 '아전인수격 해석'이라고 선을 그었다. 2019년 비선실세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 사건 상고심에서 대법원은 '이 회장 지배권 강화를 위한 그룹 차원의 승계작업이 존재했으며, 이를 위해 이 회장이 박 전 대통령에게 묵시적 청탁을 했다'고 인정했다. 검찰은 이 확정 판결을 통해 "합병의 불법성은 이미 증명됐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승계=합병'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때 거론된 승계작업이란 '포괄적 개념'에 불과하다는 것. 즉, '승계 일반에 대한 편의를 봐달라고 한 혐의'가 받아들여졌을 뿐, '구체적 합병에 대한 청탁 사실'까지 모두 입증된 건 아니란 취지다.
결국 국정농단 재판에서 대법원이 삼성과 청와대 사이에 오간 '묵시적·포괄적 청탁'만 인정했을 뿐, '구체적 합병'까지는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대법원 판례를 활용해 합병의 불법성을 증명하려던 검찰 논리가 빈약해진다. '이 회장이 대통령을 통해 합병의 캐스팅보트였던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에 개입했다'는 혐의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개별 현안에 관한 청탁을 했다고 보긴 어렵다는 게 대법원 판결"이라며 물리쳤다.
나아가 이번 1심은 당시 문 전 장관과 홍완선 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이 국민연금의 합병 찬성을 압박한 과정에서도 삼성 차원의 부정 청탁은 없었다고 결론 내렸다. 이 회장의 국정농단 재판에서 △청와대 경제수석실 및 복지부 관계자들이 "삼성의 부탁을 받은 적은 없다"고 진술한 점 △박근혜·이재용 단독면담은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 후에 이뤄진 점 등이 인정된 데 따른 결론이었다.
결과적으로 총수 일가에게 유리한 승계 구도를 짜기 위해 압력을 넣은 '선수'는 있었지만, 이를 지시한 '감독'의 의도와 역할은 명확하지 않았다는 게 이번 1심의 결론이다. '선수'가 지시 없이 자의적으로 뛰었을 가능성이 낮다는 점에서, 시민사회에선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참여연대는 논평을 통해 "이번 판결대로라면 뇌물을 주고 받아 처벌은 받았지만, 정작 그 뇌물의 목적(합병)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셈"이라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