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패밀리' 만든 창의성...가르쳐서 될까? 타고나는 걸까?

입력
2024.02.15 04:30
20면
<40> 창의성에 대한 오해와 현실

편집자주

아무리 유명한 예술작품도 나에게 의미가 없다면 텅 빈 감상에 그칩니다. 한 장의 그림이 한 사람의 삶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맛있게 그림보기는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그림 이야기입니다. 미술교육자 송주영이 안내합니다.

2020년 미국 아카데미상(오스카상) 4개 부문 수상에 빛나는 영화 '기생충'을 만든 봉준호 감독. 그의 외할아버지는 1930년대 한국 모더니즘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박태원(1909~1986)이다. 아버지 봉상균은 국립영화제작소 미술실장을 지낸 1세대 그래픽 디자이너였고, 형 봉준수는 서울대 영문과 교수, 누나 봉지희는 연성대 패션산업과 교수다. 아들 봉효민도 영화감독으로 활동하고 있음이 알려졌다. '예술가 집안'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릴 정도로 화려한 면면에 사람들은 "유전은 못 속인다"며 입을 모았다.

전 세계적으로 일가가 예술 분야에서 활동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여기서 생기는 질문 하나. 예술가의 창의성은 유전일까 아니면 노력과 교육으로 가능할까. 창의성이 타고나는 것인지 아니면 길러지는 것인지에 대한 논쟁은 지난 100년간 교육계의 뜨거운 화두 중 하나다.

오래전 예술가는 세습되던 직업

서양미술사에는 유명한 예술인 가문이 몇 있다. 15~17세기 플랑드르(네덜란드 지역) 미술은 반 에이크 가문, 프랑켄 가문, 브뤼헐 가문이 이끌었다. 이 당시 화가들의 공방은 길드(도제연합)로 운영되는 가족 사업이었고 그들의 이름은 오늘날의 이른바 명품 브랜드처럼 명망 있고 권세가 있었다.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식’을 그린 얀 반 에이크(1390~1441)는 형 휴버트 반 에이크(1370?~1426)의 뒤를 이어 ‘겐트 제단화’를 완성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반 에이크 형제는 최초로 유화물감을 개발해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6세기 프랑켄 가문도 많은 화가를 배출했다. 아들이 아버지와 구별하기 위해 '젊은(the young)'이라고 서명했고, 이후 자신의 아들이 그림을 시작하면 그때는 자신을 '늙은(the old)'이라고 서명하는 식으로 형제들과 아들들이 이름을 돌려 사용했다. 그렇게 100년 넘게 젊고 늙은 프랑켄들이 활약했다.

약 200년간 화가를 배출해 하나의 거대한 예술가 왕조를 이룬 가문도 있다. '눈 속의 사냥꾼'으로 널리 알려진 대 피터르 브뤼헐(1525~1569)과 그 후손들이다. 그들은 이전에 없던 사회비판적 시선으로 위트와 풍자가 가득한 창의적인 그림들을 남겼다. 피터르 브뤼헐이 당시 합스부르크 궁정화가였던 피터르 쿠케(1502~1550)의 제자와 사위가 되면서부터 브뤼헐 가문의 역사는 시작됐다.

피터르 브뤼헐의 장모, 즉 피터르 쿠케의 아내 메이켄 베르훌스트(1518~1596)는 기록에 따르면 "지역에서 가장 뛰어난 네 명의 여성 화가 중 하나"였다. 그녀는 화가의 딸이었고, 다시 화가의 아내, 어머니, 장모, 그리고 할머니로서 집안사람들의 미술교육을 담당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피터르 브뤼헐이 사망할 당시 그의 아들은 겨우 4세였다. 아버지로부터 그림을 배우지 못했지만, 브뤼헐 공방의 실질적 리더였던 할머니 베르훌스트의 미술교육이 있었기 때문에 그 아이가 훗날 피터르 브뤼헐 2세(1564~1638)로 성장했다고 연구자들은 보고 있다. 사돈에 팔촌까지 모두 화가였던 브뤼헐 가문의 그림 공방은 그렇게 200년간 큰 성공을 거뒀다.

서유럽과 마찬가지로 아시아에서도 예술 분야 전문직은 신분제로 묶여 세습됐다. 중국 송대부터 상류층 취미로 문인화가 시작됐지만 기능직인 화공, 도공, 악공들과 구별됐다. 조선 초기에는 선발시험으로 화원을 뽑았지만 중기 이후 군역 면제가 되는 화원에 들어가기 위해 점차 화원직이 세습됐다. 도공직도 주로 세습됐는데 임진왜란을 겪으며 많은 고생을 했던 탓에 자식에게 도공직을 물려주지 않으려 애썼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에는 대를 이어 가업을 계승한다는 시니세(老舗) 전통이 있다. 여관, 식당, 공방 등 가게를 대물림하는 이 전통은 최근에는 많이 사라졌지만 한때는 일반적이었다.

현재 예술가는 자기 의지로 선택하는 직업

가풍의 영향을 크게 받는 직업이라는 예술가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 것은 불과 100년 정도다. 더 이상 직업을 정하는 것은 세습이 아닌 개인의 선택이 됐다.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그림 공장을 물려받아야 했던 이들은 다른 직종을 선택하기 시작했고, 20세기 전후로 시각예술을 자기표현과 자기철학의 도구로 선택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도제식 길드와 유사했던 아카데미(미술대학)에 저항하거나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지 않아도 예술가라는 타이틀을 획득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계몽주의와 모더니즘 사상이 맞물려 돌아가던 20세기 초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인간성에 대해 성찰하게 된 사람들은 전 인격적인 예술 교육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산업혁명 이후 시작된 공교육 제도로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이 교육 혜택을 누렸다. 1960년대 미국과 옛 소련이 대결한 냉전시대에는 누가 먼저 과학기술을 선점하는지가 중요했고, 점차 뛰어난 능력을 가진 아이들을 육성하는 수월성 교육에 관심이 쏠렸다. 개인의 탁월한 능력과 재주는 어떤 식으로든 국가와 사회를 위해 발현돼야 한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아졌다. 사람들은 각자가 고민하며 어렵게 선택한 분야와 직종에서 성공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어느 분야든 사회적 인정과 부와 명예를 얻는 식의 성공에 이르는 사람은 소수다. 사람들은 그 소수를 ‘창의성 있는 천재’라 부르며 동경했다. 신의 선택을 받은 몇몇에게 허락된 창의성으로부터 세상을 좋게 변화시킬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나온다고 여기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천재와 독창성에 대한 오해는 21세기로 넘어오면서 풀리는 중이다.

창의성에 대한 오해: 천재와 독창성

최근 유전자(DNA) 연구에 따르면 약 22%의 유전적 변이가 창의성과 관련이 있음이 확인됐다. 그중에서도 조울증과 정신분열증과 관련이 있는 유전자, 그리고 쾌락 중독을 일으키는 도파민 형성과 관계하는 유전자에 시선이 쏠렸다. 새로운 아이디어, 백일몽과 같은 상상력이 창의성의 중요한 요인이며 이것은 뇌세포의 총체적인 협력 속에 이뤄진다는 것이 현재 연구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즉 창의적 사고는 좌뇌와 우뇌의 긴밀하고 복잡한 상호작용 속에서 이뤄진다.

독창성을 의미하는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에도 오해가 있다. 하늘 아래 완전한 새것을 만드는 일이 창의적인 일이라 여겨졌으나 기실 현실에는 완전하고 완벽한 새것은 없다. 스티브 잡스가 인용한 피카소의 문장인 "좋은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가 지적하듯 말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문장조차도 완전히 독창적인 것이 아니다. 1892년 한 잡지에 실린 문장을 영국의 문인 오스카 와일드와 토머스 엘리엇이 몇 단어를 바꿔 인용했고, 그걸 다시 피카소가 고쳐 쓴 문장이다. 그러니까 피카소가 처음 한 말도 아니다. 이렇듯 창작이란 문화 속의 요소들을 변용, 변화시키며 새로워지는 것이지 아무것도 없던 진공 상태에서 무언가를 창조하거나 발견하여 '유레카'를 외치는 작업이 아니다. 교육학에서 다루는 창의성 개념 또한 교육과정의 중요 목표로서 연구된 것은 채 100년이 되지 않는다.

창의성은 비록 유전의 영향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절대적이지 않다. 예술가와 같은 창작자 역시 새로운 세계를 뚝딱 만들어내는 연금술사 같은 존재가 아니다. 역사적인 천재 아인슈타인의 뇌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봐도 그의 뇌는 특별하지 않았다고 하지 않던가. 어쩌면 사람들은 그의 뇌에서 특별한 무언가를 발견하기를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천재가 아닌 이유, 내가 창의적인 사람이 못 되는 합리적 변명을 유전에서 찾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행복감이 결여된 창의성이 의미가 있을까

뛰어난 예술가는 풍부한 문화자본에서 비롯된다는 주장도 있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경제자본에 따라 나눠진 계층 안에서 이뤄지는 문화적 대물림을 ‘아비투스’라 명명하고 이러한 불평등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어린 시절의 가정 환경, 교육 환경의 영향이 크다는 이야기는 당연하게 들리면서도 어딘가 불편하고 예민한 문제다. 금수저 예술가 집안 출신이 아닌 예술가 지망생은 성공에 불리한가. 아무리 공교육에서 예술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한다고 해도 사적으로 이뤄지는 교육을 뛰어넘지 못하는가. 이러한 질문들 앞에서 교육학자들은 고민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2013년에 펴낸 '예술교육보고서'에서 그 고민의 흔적이 읽힌다. 이 보고서는 예술 교육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기획됐다. 이 보고서의 서문에는 "OECD 국가들에서 경쟁력 있는 산업을 이끌고 있는 이들 대부분이 예술 훈련을 받았다는 이유로 모두가 예술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수학, 과학 등의 중요성에 밀리는 것도 사실”이라며 예술 교육의 당위성을 입증할 최신 연구들을 조사했다. 그러나 입증은 쉽지 않았다. 창의성이 유전인지 양육의 결과인지 입증되기보다는 경계가 불분명한 복잡한 상호관계에 있다는 잠정 결론으로 마무리되는 연구가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새롭게 확인된 몇 가지 연구는 흥미롭다. 창의적 글쓰기 능력은 가족의 영향이 크다는 것, 그리고 다른 문화권을 자주 접한 사람이 창의성이 높다고 한다. 부모보다는 배우자(파트너)가 창의성에 더 많은 영향을 준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당시 OECD 교육부장 바바라 이싱거는 “예술 교육은 어떤 식으로든 인류의 혁신에 기여했을 것이며 예술적 체험 없이 한 개인의 행복한 삶을 상상하기 힘들다”고 밝혔다.

예술 교육은 개인의 행복을 위한다는 말에 동의한다. 부모는 자녀의 행복한 삶을 바란다. 뛰어난 과학자나 예술가로 성장했더라도 스스로 불행하다고 절망한다면 그 양육을 성공이라 할 수 있을까. 예술적 창의성이 22%의 생물학적 유전의 영향을 받고, 양육과 환경이 그 나머지를 맡는다면 그 시작은 가장 작은 시스템인 가정일지도 모른다. 500년 전 아내이자 어머니, 할머니로서 브뤼헐 집안사람들에게 미술 교육을 실천했던 화가 메이켄 베르훌스트에게서 예술적 창의성 교육의 모범을 읽는다. 시대와 환경이 달라졌다지만 국가, 사회, 학교, 교사가 주는 영향보다 더 큰 영향은 누구에게서 오겠는가.

미술교육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