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 비용을 들여 삼성의 경영권을 이건희 전 회장으로부터 승계하기 위해, 제일모직(모직)과 삼성물산(물산)의 불법 합병을 주도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재용(56) 삼성전자 회장이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2부(부장 박정제)는 자본시장법과 외부감사법 등을 위반한 혐의로 기소된 이 회장에게 5일 무죄를 선고했다.
이 회장은 2015년 모직과 물산의 위법한 합병을 주도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검찰은 이 회장이 삼성그룹 미래전략실(미전실)과 공모해 가장 적은 돈을 투입해 그룹 지배력을 강화하려 했다고 봤다. 또 안정적으로 경영권을 승계하기 위해 △거짓 정보 유포 △중요 정보 은폐 △허위 호재 공표 등을 동원해 모직에 유리한 합병을 하도록 했고, 이 여파로 물산 주주 등이 피해를 당했다는 혐의를 적용했다. 이 회장은 불법 합병을 은폐하고 모직 자회사인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자본잠식을 막기 위해 4조5,000억 원대 분식회계를 저지른 혐의도 받았다.
재판부는 모직과 물산의 합병이 경영권 승계작업의 일환이라는 사실까지는 인정했다. 재판부는 "미전실이 '프로젝트-G'(경영권 승계 계획안) 등을 세워 합병으로 인한 일감 몰아주기 규제 등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검토해왔고 합병 과정 등에서 밀접하게 협의한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며 "합병으로 이 회장의 그룹 지배력 확보 등에 유리한 영향을 미치는 효과가 발생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그러나 '합병이 이 회장의 경영권 승계만을 위한 것'이라는 검찰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침체하던 물산을 살려 신성장 동력을 얻으려는 경영상 판단에 따라 합병했다는 이 회장 측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재판부는 "승계 계획은 삼성그룹 지배구조를 유지하고 강화할 방안을 종합 검토한 것일 뿐이지 물산 주주 등을 희생시키는 약탈적 방법이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며 "합병을 통한 그룹 지배력 강화는 물산과 물산 주주들에게 이익이 된다"고 판단했다. 결국 경영권 승계가 고려됐더라도 합병 자체가 부당하다고 볼 수는 없다는 얘기다.
재판부는 이번 결론이 기존 대법원 판결과도 모순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대법원이 과거 이 회장의 뇌물 등 혐의 재판에서 합병을 경영권 승계 작업의 일환으로 본 것은 맞지만, 그 방식이 위법했거나 물산 및 그 주주들에게 피해를 끼쳤다고 판단한 것까진 아니라는 취지다.
재판부는 삼성바이오 분식회계 혐의에도 죄책을 물을 수 없다고 봤다. 회계 장부에 거짓 정보가 기재되지 않았으며, 회계사들과 올바른 회계처리를 한 것으로 보인다는 취지다. 이 회장과 함께 재판에 넘겨진 최지성 미전실 실장 등 전직 삼성 임원들도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 회장 변호인은 선고 직후 "이번 판결로 합병과 회계처리가 적법하다는 점이 분명히 확인됐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최후진술에서 손을 떨며 목까지 메인 채로 "삼성이 국민에게 사랑받는 기업으로 거듭나도록 모든 것을 쏟겠다"고 말했던 이 회장은 무죄 판결 직후 옅은 미소를 지었지만, 소감 등을 밝히지는 않았다.
시민단체들은 '재벌 봐주기 판결'이라고 반발했다. 참여연대는 "재벌은 지배력을 승계하기 위해 함부로 그룹사를 합병해도 된다는 괴이한 선례를 남긴 판결"이라고 평가했고,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은 "법원과 검찰은 이 회장의 소유지배 확립을 위한 30년 대서사시의 충실한 조연이 아니었는지 참담하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