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회 한번 와요”… 전치 10주 가해자가 구치소에서 편지를 보내왔다

입력
2024.02.06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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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피해자: ④노심초사 피해자들]
추행 피해자 돕다가 폭행당해 전치 10주
구속된 가해자가 보낸 편지에 '보복' 공포
가해자 가족이 찾아와 '합의' 종용하기도


편집자주

'맞은 놈은 발 뻗고 자도, 때린 놈은 발 못 뻗고 잔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악행의 책임을 언젠가는 져야 하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그러나 세상엔 '배 째라 정신'으로 무장한 가해자들이 많습니다. 현실에선 가해자의 보복성 언행이나 나 몰라라 식 무책임 탓에, 피해자가 더욱 고초를 겪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보복과 위협을 막는 장치가 있지만, 여전히 부족합니다. 반성은커녕 사건을 무마하려고 접근하는 가해자, 합의를 종용하며 집까지 찾아오는 가해자 가족들의 2차 가해로 잠 못 이루는 피해자들의 절박한 심정을 들어봤습니다.


"너 또 이러고 있냐. 이리 와봐!"

후덥지근한 날이 이어지던 2012년 7월 13일 초저녁. 평소처럼 배달 일을 마치고 동네 어귀로 들어서던 당시 예순아홉 살 최정남(가명)씨 눈에 '그놈'의 모습이 들어왔다. 일주일 전 근처 골목에서 여성들 뒤를 쫓으며 다리를 더듬던 사내였다. 그때 분명 "왜 여자를 만지고 다니냐"고 꾸중했건만 또다시 지나가는 여성들을 추행하고 있었다.

'혼쭐을 내야겠다' 싶어 남성을 불러 세웠다. 그러나 그 남성은 충고를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다.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피할 새도 없이 정남씨 가슴을 발로 걷어차고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정남씨가 쓰러진 뒤에도 사정없이 몸을 짓밟았다. 고통스러워하는 정남씨를 남겨두고 유유히 오토바이를 타고 사라진 그는, 며칠 뒤 한 여성을 성폭행한 혐의로 체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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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에서 주소 노출... 가해자가 접근했다

병원에선 대퇴부 골절에 발가락 3개가 부러졌다고 했다. 전치 10주 진단이 나와, 3주 입원을 하고도 일주일에 한 번씩 진통제를 탔다. 비탈길에 위치한 판잣집과 병원을 오가는 게 고생스러웠지만 '옳은 일을 했다'는 확신으로 정남씨는 견뎠다.

하지만 자부심이 공포로 바뀌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건 5개월 뒤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은 가해자가 구치소에서 편지를 보내왔다. "사장님 진술에 모순된 점이 너무 많아 항소를 하려고 하니 시간 되면 면회를 와달라"는 내용이었다. 주소는 정남씨가 제출한 배상명령신청서에서 확인했다고 한다.

가해자가 내 주소를 이렇게 알고 있다니. 사죄의 표현이 묻어 있긴 하나 피해자 눈엔 '협박 편지'로 보였다. 누군가 해코지해도 도움 청할 곳이 마땅치 않은 후미진 재개발 마을이었다. "나랑 집사람 노인네 둘 사는 집에서 죽여도 아무도 모르겠구나 싶더라고. 한 동네 살던 사람인데 누구 시켜서 찾아올까 봐 소름이 끼쳤어."

돈 때문에 못 가는 이사

이사가 간절했지만, 문제는 돈. 다친 후로 일손을 놓은 탓에 범죄 피해자를 위한 임대주택에 낼 보증금조차 마련이 어려웠다. 딸 셋에게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늙은 아버지 간병이 부담스러웠는지 연락이 끊어지고 말았다. 정작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할 때는 '부양의무자'인 자식들이 있다며 2021년까지 등록이 안 됐지만 말이다.

가해자의 출소 날짜가 다가올수록 단칸방에서 뒤척이는 밤이 늘었다. 구청에 부탁해 설치한 방범용 폐쇄회로(CC)TV도 보복 범죄로부터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고 한다. 범죄 피해자 중상해 구조금 1,100만 원과 생계비도 노후자금으로는 빠듯했다. 아내가 노인 일자리 사업으로 돈을 탄 적도 있지만 활동 기간 제한이 있어 1년을 넘기지 못했다.

결국 사건 초기 도움을 받았던 범죄피해자지원센터에 다시 SOS를 쳤다. 정남씨 형편을 잘 아는 직원들이 2주에 한 번씩 반찬을 날라다주며 안부를 살폈다. 다만 피해자를 위한 정부 제도 중에도 보증금 지원은 없기에 센터 자체적으로 온라인 모금을 진행했다. 그렇게 모은 500만 원으로 정남씨는 올해 드디어 임대주택에 입주한다.

남편 폭력·추행에 무작정 나간 집


"맡길 데가 없어서 초등학교 끝난 둘째를 노상 PC방만 보냈다니까요."

범죄 피해자 고미연(가명∙51)씨. 그에게도 가장 편안해야 할 집은 두려움의 장소가 됐다. 지난달 10일 서울서부범죄피해자센터에서 만난 미연씨는 14년 전 '그 사건'을 덤덤하게 털어놓다가도 그 이후 1년간의 '떠돌이 생활'을 언급할 때면 왈칵 눈물을 쏟았다.

미연씨는 가정폭력 피해자이자 친족 성범죄 피해자의 엄마다. 그러니까, 미연씨 남편이 친딸 지혜(가명∙28)를 성추행한 것이다. 남편의 학대에 시달리다 2008년 집을 뛰쳐나온 그는 2년 뒤 어느 날 딸의 어깨에 큰 멍이 든 걸 보고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캐물으니 "그동안 아빠가 몸을 만지고, 거부하면 때렸다"고 털어놨다.

그길로 첫째 지혜와 둘째를 남편과 살고 있던 경기 안양 집에서 빼왔다. 우선은 그간 미연씨가 얹혀살던 서울 지인의 아파트에 데리고 갔다. 피해자를 위한 임시 숙소를 알아보기도 했지만, 거주 가능 기간이 너무 짧거나 열두 살 아들과 함께 들어갈 수 있는 가족 시설이 없었다. 별수 없이 아이들은 서울에서 경기까지 광역버스를 타고 학교를 다녔다.

"합의해"... 은신처 들이닥친 시댁 식구들

더부살이 생활도 잠깐. 시댁 식구들이 집 앞에 찾아왔다. "그런 일 없었다고 진술을 바꾸라"거나 "합의를 하자"는 것이었다. 남편의 형사 1심 재판 중 은신처 주소가 노출됐다. 딸아이 학교까지 알아낸 시누이가 교무실로 전화를 건 일도 있었단다. "차 한 대가 집 근처에 서 있었어요. 외출할 때면 옆집 언니한테 '누가 찾아와도 우리 여기 안 산다고 해줘'라며 부탁했죠."

그때부터 여관과 친구 집을 전전했다. 도움을 청하러 찾아간 주민센터에서 범죄 피해자를 위한 임대주택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아직 법적인 부부였던 남편 명의로 안양 집이 있어 신청이 불가능했다. "그 집은 남의 집이나 마찬가지"라고 아무리 호소해도 소용없었다. 그래서 미연씨는 지혜 재판과 이혼 절차를 함께 밟았다.

살림만 하던 미연씨는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기초생활수급자 등록도 당장 집 문제가 해결돼야 가능할 듯싶었다. 손해배상이나 양육비 청구는 더 이상 전 남편과 얽히고 싶지 않아 포기했다. 막막한 마음에 서울 시내를 걷고 걷다가 다다른 명동에서, 미연씨는 한 포장마차에 들어가 무작정 "일 좀 시켜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생전 처음 하는 장사로 아이들을 먹여 살리는 1년 동안 이곳저곳에서 "서류를 다시 떼 와라" "이 조건으로는 어렵다" 소리만 듣고 나니, 정부에 대한 미연씨 분노는 이미 머리끝까지 차올랐다고 한다.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직원을 보자마자 욕지거리가 치밀어 올라 "너네가 나한테 뭘 해줄 수 있는데"라는 소리가 튀어나올 정도였다.

다행히 미연씨는 긴급생계비 지원이 가능했다. 그 돈으로 LH전세임대주택을 들어갔다. 곰팡이가 슬고 빗물이 새는 반지하 투룸이었지만, 징역 2년을 선고받은 남편이 출소하기 전 구한 세 식구 아지트였다. "당장 갈 곳 없는 피해자들이 있어요. 범죄 피해가 첫 번째라면, 저희에겐 공포에 떨면서 집을 구하러 다닌 게 두 번째 상처였죠."

14년 세월은 남편이 미연씨와 아이들에게 남긴 상처를 아직 치유하지 못했다. 미연씨의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최다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