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 주심으로 잘 알려진 강일원 전 헌법재판관. 그가 이달 초 대검찰청 한 회의실에 들어섰다. 이 방 한편엔 번호가 적힌 공이 수십 개씩 든 기계 4대가 있었다. 딱 봐도 이건 로또 추첨기. 빨간 버튼을 누르자 '왱' 소리와 함께 강한 바람이 사정없이 들이치며, 주먹보다 작은 스티로폼 공들이 회오리를 그렸다. 기계 앞에 선 강 전 재판관이 한쪽 팔을 넣어 공을 하나씩 뽑았다. 4대의 추첨 기계에서 모두 열다섯 개의 공이 뽑혔다.
로또 구매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는 토요일 밤 로또복권 추첨 생방송 같은 이 광경. 그러나 대검에서 있었던 추첨은 복권 번호 선정이 아니라 '검찰수사심의위원회'(수심위) 위원을 선정하는 절차다. 이날 수심위원장인 강 전 재판관이 뽑은 15개의 공 안에는 이태원 참사 관련 서울경찰청장의 기소 여부를 심의할 위원 15명의 고유번호가 들어 있었다.
검찰은 국정농단 사태 이후 검찰개혁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거세지자, 2018년 1월 문무일 당시 검찰총장 주도로 수심위 제도를 마련했다. 검찰의 공소권 독점과 남용을 견제하기 위해, 수사와 기소 과정을 점검하고 검찰 외부 전문가로부터 △수사 계속 △공소 제기 △불기소 처분 여부 등을 심의받자는 취지였다.
운영지침을 담은 대검찰청 예규도 신설됐는데, 이때 가장 주안점을 둔 부분이 '공정성'이다. 예규 10조 2항은 "위원장은 위원명부에 기재된 위원 중 '무작위 추첨을 통해' 심의기일에 출석이 가능한 위원 15명을 현안위원회 위원으로 선정한다"고 규정한다. 현재 수심위원은 △변호사 △법학교수 △시민단체·종교·기타 전문직 △비법학교수·언론인·퇴직공직자 등 직역별 4개 그룹으로 구성돼 있다. 그룹당 50~60명으로, 현재는 이 풀(pool)에 들어간 총인원이 250명 조금 안 된다.
주무부서인 대검 정책기획과는 예규상 '무작위 추첨'을 하기 위해 추첨용 기계 4대를 구매했다. 앞면은 투명하고 윗면은 불투명한 구조다. 이런 독특한 구조 때문에 서울중앙지검의 검찰시민위원 2명과 대검 관계자 등 참관자들은 뽑힌 공의 번호를 확인할 수 있지만, 정작 윗면 구멍을 통해 공을 뽑는 수심위원장은 통 내부를 볼 수 없다.
위원 선정 절차는 이렇다. ①안건 성격에 따라 위원장이 4개 그룹별 할당 인원을 정한다. ②그 뒤 위원장이 각 그룹별 위원 번호가 매겨진 공을 개수대로 뽑는다. ③시민위원이 위원명부에서 각 번호에 해당하는 전화번호를 불러주면 ④대검 수사관이 해당 전문가에게 전화해 참석 가능 여부를 묻는다. ⑤이렇게 뽑힌 위원 15명은 회의 석상에서 처음 서로를 만나게 된다.
전산 추첨 프로그램도 쓸 수 있었지만, 검찰은 공정성 시비를 완전히 차단하기 위해 가장 눈에 잘 띄는 '로또 방식'을 택했다고 한다. 실제 2020년 6월 수심위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부당합병 혐의에 대해 불기소를 권고하자, 일부 시민단체가 "수심위가 검찰의 자의적 판단과 의도에 따라 운영되고 있다는 의구심을 갖기에 충분하다"고 공격한 선례도 있다. 대검 관계자는 "위원 선정 절차뿐 아니라 수심위 모든 과정을 최대한 공정하게 진행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