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군마현 지사가 현내 공원에 설치된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동원 추도비 철거를 강행하면서 뒤에선 한국 관광객 유치 행보를 계속해 빈축을 사고 있다. 추도비를 만들고 지켜 온 일본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염치 없고 모순적인 행동”이라며 야마모토 이치타 지사를 비판했다.
29일 일본 TBS방송에 따르면 군마현은 다카사키시 ‘군마의 숲’ 현립공원에서 추도비 철거를 개시했다. 현 관계자는 이날 오전 9시 40분쯤 추도비 앞에서 “행정 대집행법 제2조에 의거해 추도비 철거 및 원상 회복을 위한 대집행(대리 집행)을 시작한다”고 확성기로 선언한 뒤 공원 출입을 막기 위해 펜스를 설치하는 등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2, 3일 후 본격적으로 철거 작업을 시작해 다음 달 11일까지 완료한다는 계획이다.
야마모토 지사는 한일관계에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추도비 철거를 강행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한국인 관광객 유치에 힘을 쏟고 있다. 일본을 방문했던 오영훈 제주지사는 지난 26일 야마모토 지사를 만나 ‘제주도·군마현 실무교류 협의서’를 체결했다. 이 자리에서 야마모토 지사는 “관광과 청년 분야 등 여러 면에서 교류하고 싶다”며 군마현을 최고의 온천 관광지로 소개했다. 그는 지난해 8월 말에도 한국 관광객 유치를 위해 제주와 서울 등을 방문하고 오 지사의 답방을 요청했다.
오 지사는 면담 자리에서 추도비 철거 문제를 언급하며 “한일 양국 관계가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잘 고려해 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야마모토 지사는 “그 건은 알고 있다. 한일관계가 계속 좋아야 한다는 점엔 공감한다”고 말하는 데 그쳤다고 오 지사는 밝혔다. 차별 문제와 싸워 온 일본 시민단체 C.R.A.C의 우에다 유스케 활동가는 “한일 우호를 다짐한 추도비를 철거하면서 한국인 관광객이 군마현에 올 것을 기대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비판했다.
군마현은 신중한 대응을 요청한 한국 정부의 뜻도 무시했다. 한국 외교부 당국자는 지난주 추도비 철거 강행과 관련, “양국 간 우호 관계를 해치지 않는 방향으로 해결되기를 기대한다”며 “(군마현과) 필요한 소통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야마모토 지사는 “외교 경로로 연락이 온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한국 측이 군마현 담당 부서에 여러 차례 의견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정부는 입장 표명을 회피했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은 29일 철거 작업 개시와 관련한 질문에 "군마현이 그렇게 판단한 것"이라며 "자세한 내용은 군마현에 문의해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추도비는 일제강점기에 강제동원됐다가 사망한 조선인 노동자를 추모하기 위해 일본 시민단체 ‘기억 반성 그리고 우호의 추도비를 지키는 모임’의 전신이 2004년 설치한 것이다. 비석 앞면에는 '기억 반성 그리고 우호'라는 문구가 한국어·일본어·영어로 적혔고, 뒷면에는 “조선인에게 큰 손해와 고통을 준 역사의 사실을 깊이 반성, 다시는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표명한다”는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다.
당시 군마현은 ‘정치 행사를 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붙여 건립을 승인했다. 그러나 2012년 열린 추도제에서 한 참가자가 ‘강제연행’을 언급했다고 혐한·우익 단체가 지적하자 현은 ‘조건을 위반했다’며 설치 허가 갱신을 거부했다. 1심에선 군마현 처분이 적법하지 않다는 판결이 내려졌으나 항소심은 적법하다고 판결했고, 일본 최고재판소는 이를 확정했다. 군마현은 이를 근거로 시민단체 측에 지난달까지 추도비 철거를 요구했고 이뤄지지 않자 강제 집행에 나섰다.
철거 개시 하루 전날인 28일엔 시민단체 활동가 등 150명이 현장에 모여 철거 반대 집회를 열고 추도비 앞에 헌화했다. 후지이 마사키 군마대 헌법학 교수는 아사히신문에 “추도비가 철거되면 결과적으로 역사 수정주의를 조장하고 다른 지방자치단체에 나쁜 선례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항소심 판결은 철거까지 요구하지는 않았다”며 “추도비 앞에서 추도식이 10년 이상 열리지 않은 것을 고려해 새로운 대응을 검토해야 하는데 철거 일변도로 나가 대립을 부채질했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