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와 같이 출근 준비를 마친 실리콘밸리 '빅테크(주요 기술기업)' 직원 A씨. 집을 나서려고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는데 '부재중 전화' 표시가 떠 있었다. 직속 상사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이 시간에 전화한 걸 보니 꽤 급한 일인가 보다' 생각한 그는 바로 상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사 B: "메일을 봤나 보군요."
A: "전화하신 것 보고 전화드린 겁니다. 제가 확인해야 할 메일이 있나요?"
B: "그렇군요. 그럼 메일함부터 확인해 보겠어요? 회사에서 보낸 메일이 있을 거예요."
전화를 끊는 순간 불길한 생각이 A씨 뇌리를 스쳤다. 잠결에 언뜻 봤던 메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인사철도 아닌데 '인사상 변동 공지'라는 제목을 하고 있어 스팸인 줄 알고 바로 휴지통에 넣었던 그 메일이다.
곧바로 메일을 살려내 읽어봤다. '지난몇 년간 세계 최고의 회사를 만들려는 우리의 노력에 의미 있는 진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가야 할 길이 멉니다. 경제 성장이 둔화했고 자금시장은 경색됐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 회사도 예외는 아니기에 우리는 중대하고도 어려운 결정을 내리게 됐습니다. 귀하가 직위에서 해고된다는 사실을 알리게 돼 유감스럽습니다.(후략)' 긴 서신의 마지막엔 퇴직금과 주식 보상, 의료보험, 재취업 지원 등 보상 내역이 길게 적혀 있었다.
이는 지난해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은 전직 빅테크 직원이 겪은 일이다. A씨는 "처음 메일을 봤을 땐 현실감이 없었다"며 "상사와 다시 통화하면서 '회사가 당신 조직 자체를 없애기로 결정했다'고 확인받고서야 이제 더 이상 출근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게 인지됐다"고 했다. 거의 열 단계의 과정을 거쳐 입사하고 5년 가까이 근무했지만 떠나는 건 한순간이었다고 그는 회상했다. 그는 "상황을 살피려고 사내 시스템에 접속했더니 이미 접근이 차단돼 있었다"며 "남 일인 줄만 알았던 해고가 하루아침에 내 얘기가 돼 있었다"고 했다.
한국에선 보기 드문 A씨의 사례는 적어도 미국 실리콘밸리에선 특별한 게 아니다. 2022년 하반기부터 1년 이상 테크업계 전반에 이례적 감원 칼바람이 불어닥친 탓이다. 애플을 제외한 사실상 모든 기업이 정리해고를 단행했다. 글로벌 기술기업 감원 현황을 추적하는 사이트 '레이오프(layoff.fyi)'에 따르면, 지난 한 해 A씨처럼 해고 통보를 받은 사람은 26만여 명이나 됐다. 아마존과 메타에선 2만 명이 넘는 인력이 직을 잃었고, 구글·마이크로소프트(MS)에서도 1만 명 이상이 떠났다. "(닷컴 버블이 있었던) 2001년 이후 가장 많은 테크기업의 해고"(포브스)라는 평가가 나왔다.
지난해 1월 정점을 찍은 뒤 차츰 꺼진 듯했던 해고 바람은 최근 되살아나고 있다. 올해가 아직 한 달도 지나지 않았지만 벌써 93개 기업이 2만4,000여 명을 내보냈다. 미 경제매체 CNBC는 "지난해 3월(약 3만8,000명 해고) 이후 (한 달 기준) 최다"라며 "지난 한 주에만 SAP가 직원 8,000명의 직무 변경 또는 해고를 발표하고 MS가 게임 부문에서 1,900명을 해고했다"고 전했다.
테크업계에선 요즘 다시 시작된 해고가 이전까지와는 성격이 다르다고 본다. 지난해까지 몰아친 해고가 '과도한 몸집 불리기'의 후유증 해소 차원이었다면, 요즘의 해고에는 좀 더 복잡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2022년과 지난해에 걸쳐 이뤄진 대규모 해고의 경우 코로나19 팬데믹(감염병 세계적 대유행) 기간 전례 없는 성장세를 기록했던 기업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2020년 이후 재택근무가 보편화하면서 온라인 기반 사업을 주력으로 하는 대부분의 테크업체들은 매출이 급성장하고 주가가 수직상승했다. 갑자기 찾아온 호황에 업체들은 채용을 크게 늘렸다. 2019년 79만여 명이었던 아마존의 전 세계 직원 수는 2021년 말 160만여 명까지 불었고, 메타도 2020년부터 2022년까지 3년간 그전까지의 전체 직원 수와 비슷한 4만여 명을 새로 채용했다.
그러나 2022년에 들어서자 정반대 상황이 펼쳐졌다. 인플레이션, 경기 침체, 금리 인상 등 여러 악재가 겹치면서 매출이 쪼그라들었고 주가는 폭락했다. "허리띠를 더 졸라매라"는 투자자들의 압박이 이어졌다. 기업들이 잇따라 정리해고 카드를 꺼내 든 배경이다.
최근 기술기업들 상황은 지난 2년보다 상당히 개선됐다. 주가만 보더라도 대부분 빅테크들이 팬데믹 당시 최고점을 이미 넘어섰거나 거의 근접한 상태다. 해고가 불가피한 상황이라고 보긴 어렵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다시 해고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건 과거의 경험이 업계에 학습효과를 남겼기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전례 없이 큰 규모의 해고를 단행했는데도 큰 타격이 없었다는 데서 많은 경영진이 해고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대부분 기업들이 해고 계획 발표 이후 주가 상승을 경험했다. 실리콘밸리 한 엔지니어는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엑스(옛 트위터)를 사들인 뒤 기존 인력을 대거 내보내면서 7,500명가량 됐던 전체 직원 수가 현재 1,000명까지 줄었다"며 "그러나 지금 어떤가. 크고 작은 문제가 있을지언정 멀쩡히 운영되고 있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남들이 할 때 우리도 해야 한다'는 경영진들의 심리도 해고 재확산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본다. 다른 기업들이 해고할 때 해고하면 '회사 경영을 잘못해서'가 아니라 '산업 전반이 하락세여서' 불가피하게 단행하는 것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프리 페퍼 스탠퍼드대 경영학 교수는 이처럼 기업이 다른 기업들의 해고 흐름에 올라타는 현상을 '모방 해고'라 일컬었다.
최근의 해고가 인공지능(AI) 열풍과 직결돼 있다는 것 역시 과거와는 다른 지점이다. 레이오프 사이트의 공동 창업자인 로저 리는 "AI를 해고의 사유로 꼽는 테크기업이 늘고 있다"고 CNN에 말했다. 올해만 구글, SAP, 듀오링고 등이 해고를 발표하며 'AI 같은 우선순위 사업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기 위해 다른 부문에 대한 지출을 줄일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결국 AI 개발 조직만 살아남고 다른 모든 직군은 그들이 만든 AI로 대체되는 것 아니냐'는 극단적 전망까지 나오는 이유다.
기업 환경이 개선됐는데도 채용이 늘기는커녕 해고만 잇따르면서 '빅테크 출신은 망하지 않는다'는 것도 옛말이 되고 있다. 빅테크에서 일한 이력이 있는 이들은 해고된다 해도 다른 회사에서 금방 모셔 간다는 뜻에서 생겨난 말인데, 채용시장에 구직자가 계속 늘면서 요즘은 아무리 빅테크 출신이라도 쉽게 새 직장을 찾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지난해 10월 기준 미국 내 기술 분야 실업률은 4.3%로, 전체 평균(3.8%)을 웃돌았다. 작년 말 해고 이후 새 직장을 알아보고 있는 한 하드웨어 디자이너는 "과거 같으면 지원을 꺼렸을 법한 회사도 일단 지원서를 넣고 있는데 항상 경쟁률이 수백 대 일"이라며 "나중에 뽑힌 사람을 보면 더 큰 회사에서 훨씬 많은 연봉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은 이력을 갖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다행히 해고 칼날을 피한 이들도 상황이 나빠진 건 마찬가지다. 회사가 비용 절감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복지 혜택을 대거 줄이고, 출장 등 각종 지출을 더 까다롭게 관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넉넉한 복지로 한때 '신의 직장'으로도 불렸던 구글, 메타 등은 구내식당 메뉴 간소화, 사내 카페 운영 시간 단축, 마사지 서비스 축소, 무료 미용 및 세탁 서비스 폐지 등의 조치를 취했다.
4년 전 한국 대기업에서 실리콘밸리 빅테크로 이직한 뒤 바로 팬데믹이 터져 회사로 출근한 적이 거의 없었던 한 하드웨어 엔지니어는 요즘 "회사가 시킨 대로 주 3회 출근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다음 해고 타깃이 되지 않기 위해 알아서 회사의 눈치를 보는 분위기가 부쩍 짙어졌다"며 "한때 '연봉은 많고 스트레스는 적다'던 실리콘밸리가 달라지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