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아이돌은 혼잣말도 사과해라?…억지 비난이 만든 ‘칼국수 사과문’

입력
2024.01.29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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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괴롭힘에 1년 고통 받고도
'태도 논란'에 사과문 낸 뉴진스 민지
여성은 '태도' 사과, 남성은 '범죄' 사과
"여성 아이돌에게 훨씬 많은 것 요구"
소속사는 보호보다 이미지 타격만 우려

“편식이 심해 칼국수를 먹어본 적이 없어 칼국수의 종류와 맛을 생각하다 저도 모르게 ‘칼국수가 뭐지?’라는 혼잣말이 나와 버렸습니다. 혼잣말이라 오해가 생길지 몰랐고…(중략)... 답답한 마음에 해명을 했지만 너무 미숙한 태도로 실망시켜 드린 점 스스로도 많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아이돌그룹 뉴진스의 민지가 지난 16일 팬 소통 앱 포닝에 올린 사과문이다. 이를 접한 이들은 대부분 의아해했다. “칼국수를 모르는 게 사과할 일인가?”

발단은 이랬다. 지난해 1월 유튜브 채널 ‘침착맨’에 출연한 민지는 “칼국수가 뭐지”라고 말했다. 프로그램 진행자가 민지의 편식에 대해 말하는 도중 혼자 작은 목소리로 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 말은 그를 집요하게 따라다녔다. “강원도 출신이 유학파인 척한다” 등 1년 간 악성 댓글과 조롱 콘텐츠에 시달린 민지는 지난 2일 팬들과의 라이브방송에서 “제가 칼국수를 모르겠어요?”라고 정색하고 말했다. 이는 또다시 ‘태도 논란’으로 번졌고, 결국 민지는 사과문을 올렸다.

어린 여성 아이돌을 향한 ‘억지 비난’은 이뿐만 아니다. 아이브 장원영은 큰 딸기를 두 손으로 먹고, 피자 광고에서 윙크를 했다는 이유로 “예쁜 척한다”는 비난에 시달려왔다. 지난해에는 이동 중 갑자기 나타나 팔을 뻗는 초등학생을 보고 놀라 몸을 피했다가 '인성 논란'이 일었다.


"근거 없는 우월감에 여성에게 더 많은 것 요구"

트집잡기식 논란은 유독 여성 아이돌에게 잦고, 아이돌이 어릴수록 비난의 강도도 세진다. 같은 행동을 남성이 했을 때는 문제시되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다. 2016년 그룹 레드벨벳의 아이린이 페미니즘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는 이유로 사진이 불태워지는 등 온라인 괴롭힘을 당한 것이 대표적. 당시 방탄소년단(BTS)의 RM, 유재석, 김국진, 노홍철 등도 같은 책을 읽었다고 밝혔지만 누구도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여성 아이돌은 주로 ‘태도’로 사과하지만, 남성 아이돌은 마약 투약, 성범죄, 음주운전 등 ‘범죄’ 로 사과한다는 점에서도 선명한 이중잣대가 드러난다.

전문가들은 대중이 여성 아이돌을 자신보다 낮은 존재로 여기면서 무한한 친절과 다정, 무해함을 요구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반복된다고 본다. 윤석진 충남대 국문학과 교수는 “같은 연령대 남성 아이돌에게는 그런 식으로 접근하지 않으면서 여성에게만 시선의 차이를 적용하는 것은 굉장히 폭력적일 수 있다”며 “여성이라는 사회적 약자를 바라보는 근거 없는 우월감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말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여성 연예인에게 남성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인데도 그런 통념 때문에 여성들이 태도 논란에 더 많이 휩싸인다”고 지적했다.

여성 연예인에게 '웃지 않을 권리'조차 허락하지 않는 가혹함은 한국만의 기현상이기도 하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서구에서는 연예인들의 사적인 영역에 관대한 반면 한국에선 하나하나 다 쌍심지 켜고 보면서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며 “옛날에는 국가 검열이 문제였다면 이제는 대중이 태도와 말투 하나하나를 검열하는 시대가 됐다”고 말했다.


이미지 타격만 걱정하는 소속사, 보호는 미온적

도를 넘은 온라인 괴롭힘으로부터 보호받는 여성 아이돌은 별로 없다. ‘태도 논란’이 제기되면 이미지 타격을 우려해 소속사가 사과문 발표로 논란을 종결하려는 경우가 많다. 민지의 사과문 발표 역시 소속사와 조율 없이는 불가능했을 일이다. 정덕현 평론가는 “뉴진스는 털털한 이미지보다 신비한 이미지가 강해 태도 논란이 일면 타격이 클 수 있고, 소속사 역시 이를 우려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 팬들은 악성 루머, 악플 등으로부터 가수를 보호하지 않는 소속사의 미온적인 대응에 반발하며 트럭 시위를 벌이기도 한다.

최근 아이브의 소속사 스타쉽엔터테인먼트가 장원영에 대한 허위 정보를 유포한 유튜버를 끈질기게 추적해 처벌한 것이 이례적인 사례로 꼽히는 것은 그래서다. 스타쉽은 구글 본사가 있는 미국 법원에 허위 정보를 퍼트려온 유튜브 채널 ‘탈덕수용소’ 운영자의 신상정보 공개 명령을 신청해 신상을 파악한 후 그를 상대로 1억 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고, 지난달 승소했다. 이에 소속사들이 여성 아이돌 등이 겪는 온라인 괴롭힘에 강경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남보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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