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여성이 오른손엔 어린이 손을 잡고, 왼손엔 흰색 꾸러미를 든 채 건물 앞 거리를 걷기 시작한다. 20명 남짓한 행렬의 선두였다. 아이는 백기를 흔들고 있었다. 15초쯤 흘렀을 무렵, 귀를 찢는 듯한 총성과 함께 여성은 길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어린이와 일행은 황급히 몸을 피했고, 현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미국 CNN방송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26일(현지시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항복의 의미인) 흰 깃발을 든 비무장 민간인이 총격을 당하는 사례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며 공개한 동영상의 한 장면이다.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와 전쟁 중인 이스라엘군이 피란 중인 민간인을 향해서도 총을 겨누고 있다는 사실이 또 한번 드러난 것이다.
CNN에 따르면 이 영상은 영국의 중동 전문 매체 ‘미들이스트아이’가 처음 보도한 것으로, 지난해 11월 12일 가자지구 남부 해안마을 알마와시에서 촬영됐다. 총격을 당한 여성은 팔레스타인인 할라 크라이스(57)이며, 백기를 든 채 함께 손잡고 걷던 아이는 네 살배기 손자 타옘 크라이스였다. 두 사람의 뒤를 따르던 20여 명은 당시 한집에 머물던 친인척으로, 이스라엘군이 내린 대피 명령에 따라 다 같이 이동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안전을 위해 떠난 피란길은 출발부터 비극을 맞이했다. 할라의 딸 사라 크라이스(18)는 악몽 같은 그날 상황을 CNN에 전하며 눈물을 쏟아냈다. “왜 어머니를 쐈나요. 우리는 (이스라엘군이) 시킨 대로 흰 깃발도 들고 있었습니다.” 안전한 대피를 약속했으면서도 민간인에게 총격을 가했다는 주장이다. 할라는 가슴 부분에 치명적 총상을 입었고, 남편이 집으로 데려가 응급 조치를 취했지만 끝내 숨졌다.
CNN은 위성 사진 등을 토대로 “할라의 피격 지점에서 서쪽으로 200m가량 떨어진 곳에 이스라엘군이 주둔하고 있었다는 걸 확인했다”고 전했다. 이스라엘 군인이 총격을 가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다. 해당 영상과 관련한 언론 질의에 이스라엘군은 “사건을 조사 중”이라고만 답했다.
가자지구에서 발생한 유사 사건 동영상 제보도 잇따르고 있어 이스라엘군을 향한 국제사회의 공분이 커질 전망이다. 인권단체 ‘유로메드 인권 모니터’는 비무장 민간인 살해 사건 9건을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CNN도 민간인 사망 사례 4건을 자체적으로 살펴보고 있다고 전했다. CNN은 “할라가 피격을 당한 알마와시는 이스라엘군이 ‘안전 지대’로 지정했던 곳”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