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공화당의 대선 후보 경선 레이스가 싱겁게 끝날 가능성이 커졌다. 여론조사에서 줄곧 지지율 선두를 달리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실제로도 첫 번째와 두 번째 경선 모두 낙승을 거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은 경쟁자인 니키 헤일리 전 유엔 주재 미국대사는 ‘경선이 끝나려면 멀었다’며 완주 의지를 보였지만, 이제는 점점 가중될 게 뻔한 당내 사퇴 압력과도 싸워야 할 처지다.
올해 첫 달 아이오와주(州)와 뉴햄프셔주에서 각각 다른 방식으로 치러진 두 차례의 경선이 전체 판에 미치는 영향은 사실 크지 않다. 후보에게 줄 수 있는 대의원 수가 각 40명(아이오와), 22명(뉴햄프셔)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공화당 대선 후보로 뽑히려면 대의원 총합(2,429명) 과반인 1,215명 이상을 확보해야 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두 경선에서 차지한 대의원은 30명 남짓이다.
그러나 하나를 보면 열을 아는 법이다. 23일(현지시간) 보수색이 약한 무당파에게도 투표권을 주며 프라이머리(예비선거) 방식으로 경선을 치른 뉴햄프셔는 온건 중도 보수층을 지지 기반으로 삼는 헤일리 전 대사가 가장 공들인 곳이었다. 막판까지 주 전역을 누비며 유권자들을 만나고 투표를 독려한 건 경선 직전 지지율을 끌어올려 추격의 동력을 마련하고, 당 안팎의 ‘반(反)트럼프’ 정서를 결집해 실제 득표로 연결하기 위해서였다. 트럼프 전 대통령으로선 헤일리 전 대사가 승부처로 여겼던 곳을 접수한 셈이다.
지난 15일 아이오와 코커스(토론식 당원대회)도 마찬가지다. 아이오와는 한때 트럼프 전 대통령의 유일한 ‘대항마’로 꼽혔던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가 주내 카운티 99곳 전부를 찾을 정도로 정성을 쏟은 곳이다. 그럼에도 거의 30%포인트 격차로 졌다는 건 디샌티스 주지사가 깊은 좌절감에 빠질 만한 결과다. 엿새 후인 21일 디샌티스 주지사는 역부족을 인정하며 백기를 들었다.
아이오와 압승으로 입증된 ‘트럼프 대세론’은 뉴햄프셔 표심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워싱턴포스트가 공개한 공화당 프라이머리 출구조사 결과를 보면 애초 당적이 공화당인 유권자(50%)와 비율 차이가 크지 않을 정도로 무당파(46%) 참여도가 높았고, 이들의 65%가 헤일리 전 대사에게 투표했다. 실제 이날 뉴햄프셔 맨체스터 웹스터초등학교 투표소에서 ‘누구를 찍었냐’라는 기자의 질문에 “헤일리”라고 답한 2명 모두 일부러 당일 공화당원으로 등록한 무당파였다. 그러나 기존 공화당원 표의 75%를 가져간 트럼프 전 대통령을 당해 내진 못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이번 승리엔 미국인들이 노골적으로 부담감을 토로하는 ‘이민’ 이슈를 선점한 전략이 주효했던 것으로 보인다. 뉴햄프셔 유권자가 ‘지지 후보 결정 시 가장 중요하게 고려할 것’으로 꼽은 현안은 경제(37%), 이민(31%), 외교안보 정책(14%), 임신중지(12%) 순이었는데, 이민을 최대 관심사로 꼽은 투표자의 78%가 트럼프 전 대통령을 찍었다. 그는 이날 승리 연설에서도 “감옥, 정신병원 등에서 오는 불법 이민자들이 미국을 죽이고 있다”고 말했다.
대세론은 편승을 낳는다. 뉴햄프셔 경선의 양자 구도는 덩치가 대등한 두 사람의 대결이 아니었다. 2위 경합을 하던 디샌티스 주지사가 하차하면서 ‘트럼프 지지’를 선언했고, 아이오와 경선까진 남아 있던 사업가 출신 비벡 라마스와미도 트럼프 전 대통령 측에 흡수됐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당내 유일한 흑인 상원의원인 팀 스콧과 낸시 메이스 하원의원의 부통령 후보 지명 가능성에 주목했다. 둘의 지역구는 모두 헤일리 전 대사가 주지사를 지낸 사우스캐롤라이나주다.
헤일리 전 대사는 “다음은 내가 사랑하는 사우스캐롤라이나”라며 내달 24일 해당 지역 경선까지 최소 한 달간 더 선거운동을 이어갈 계획임을 시사했다. 이미 사우스캐롤라이나 캠페인에 투입할 400만 달러(약 54억 원) 상당 광고도 예약했다. 하지만 그의 사퇴를 촉구하는 목소리는 갈수록 커질 전망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 슈퍼팩(정치자금 기부단체)인 ‘마가(MAGA·미국을 더 위대하게)’의 테일러 부도위치 대표는 성명을 통해 “이제 민주당과 싸울 때다. 니키 헤일리에게 지금은 퇴진할 시간”이라며 결단을 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