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에서 떨어져 발목이 꺾인 적이 있다. 한동안 반깁스를 하고 다녔다. 자연히 주변 환경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집에서는 별 어려움이 없었지만 횡단보도에서는 최선을 다해 걸어야 했다. 빵빵거리는 차가 무서웠다. 서 있기가 불편해 지하철 노약자석에 앉았다가 불쾌한 소리를 듣기도 했다. 계절은 여름이었고, 깁스 안에 땀이 찼다. 돌아다니기 슬프고 짜증스러운 나날이었다. 몇십 년 후 나이가 들고 나면 깁스 없이도 겪을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취약함이란 '환경에 유동적으로 좌우되는 상태'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데 문제가 없는 몸이면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더라도 큰 불편을 겪지 않는다. 반깁스를 하고 있던 상태였다면 고장 난 엘리베이터 앞에서 순식간에 막막해졌을 것이다. 그것이 취약함이다. 취약한 상태에서는 환경이 변하는 바에 따라 금세 '장애'를 겪는다. 반대로 환경이 알맞게 바뀌면 장애는 그만큼 보완된다.
엘리베이터, 자동문, 문자 통역기, 화상 채팅은 환경을 바꾸는 기술이다. 어떤 사람은 손대지 않아도 벗을 수 있는 신발을 사용한다. 눈이 나빠도 색깔로 쉽게 구별되는 조리도구, 한 손만으로도 설거지할 수 있도록 고정되는 수세미, 양말을 신겨 주는 막대형 도구. 나는 그것들이 필요하진 않았다. 다만 매일 안경을 썼다. 안경을 만드는 기술이 없는 세상에 살았다면 나는 지금보다 훨씬 장애를 겪었을 것이다.
김초엽의 단편집 ‘방금 떠나온 세계’는 여러 방면에서 취약함을 비춘다. 우리가 환경에, 기술에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 드러낸다. 수록작 ‘인지 공간’은 인지 공간이라는 거대한 구조물을 제시한다. 사람들은 인지 공간을 두 번째 뇌처럼 활용한다. 그곳에 정보를 기록하고, 연산에 도움을 받고, 다른 이들과 사유를 공유한다. 아이들은 인지 공간에 오를 만큼 자라면 공동으로 사유하는 방법을 배운다. 등장인물 ‘이브’는 허약해서 남들처럼 인지 공간에 접근하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이 자연스레 공유하는 내용을 배울 수가 없다. 현실 세계였다면 이브는 그저 몸이 약한 사람이지만 작품 속에선 인지적으로 장애를 겪는 사람이다. 인지 공간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새로운 장애가 만들어진다.
이렇듯 김초엽의 소설은 각각의 환경을 구성하는 물리적 토대를 노출한다. 또 다른 수록작 ‘숨그림자’에서는 통역기가 중요하다. 등장인물 ‘조안’은 듣고 말할 줄 아는 보통 사람이다. 그러나 조안이 깨어난 곳은 냄새로 대화하는 사회다. ‘숨그림자’ 속의 사람들은 냄새 입자를 언어로 사용한다. 입자는 소리와 달리 바로 사라지지 않으며 공기 중에서 천천히 변화한다. 어설픈 통역기로는 냄새 언어를 제대로 잡아내지 못한다. 조안은 자신의 사회에서와 달리 숨그림자에서 심각한 장애를 겪는다.
김초엽의 글에 따르면 “SF는 가상의 과학을 다루기 때문에 오히려 사회가 과학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아주 선명하게” 반영한다. 그렇게 “현실을 재구성하여 일상에 가려진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망을 드러낸다.” 작품 안에서 가상의 기술은 모두 낯선 문제를 초래한다. 이러한 문제는 또 다른 기술로 해소될 수 있다. 이브는 개인용 인지 공간을 만든다. 조안을 도우려는 ‘단희’는 입자를 분석하고 분비하는 기계를 개발한다. 이들은 환경과 신체의 상호작용 속에 장애가 자리한다는 사실을, 그것이 우리의 발전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