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8월 2일 목요일 밤 8시,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남부 라란제이라스의 한 가정집. 10세 소년 카를로스 라미레스 다 코스타는 엄마와 형, 누나들과 함께 TV 연속극을 보고 있었다. 갑자기 TV는 물론 집 안 모든 불이 꺼졌고, 금세 칠흑처럼 어두워졌다. 정전인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총을 들고 들이닥친 괴한의 소행이었다. 빨간 상의에 얼굴을 가린 괴한은 이들 가족을 화장실에 가둔 뒤 카를로스 한 명만 납치해 갔다.
아빠가 집에 돌아왔을 때 마주한 건 겁에 질린 채 화장실에 감금돼 있던 가족, 그리고 쪽지 하나였다. 여기엔 뒤죽박죽인 철자로 "이틀 뒤인 8월 4일까지 1,000만 크루제이루헤알(당시 브라질 화폐 단위·현재 환율 기준 환산 시 약 1억 원)을 마련해 앨리스가(街) 노상에 놓인 시멘트 상자에 넣어 둬라. 안 그러면 아이는 죽게 될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헌병대와 소방대가 인근 지역을 샅샅이 뒤지고도 허탕을 쳤으나, 그래도 희망은 있었다. 돈을 요구하는 메모를 남겼다는 건 납치범이 최소한 원한을 품은 인물이나 미치광이 살인마는 아니라는 뜻이다. 따라서 돈만 마련하면 어린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만 해도 몰랐다. 카를로스가 50년 넘도록 돌아오지 못하고, 이 사건이 브라질 최장기 미제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리라는 것을.
이튿날 경찰은 8월 4일을 '디데이'로 정하고, 카를로스 구출 작전에 착수했다. 이와 별개로 아빠인 주앙 멜로 다 코스타, 엄마인 마리아는 우선 아들의 몸값 마련을 위해 시민 모금에 나섰다. 주앙은 제약회사를 운영하는 기업인이었지만, 그 당시 '1,000만 크루제이루헤알'은 당장 마련하기 힘든 거액이었던 탓이다. 이미 신문과 TV 뉴스 등을 통해 이 사건이 널리 알려진 터라 기부금은 목표액의 3배 이상 모였다. '납치범 요구대로 돈을 넘겨주는 사이 놈을 체포한다'는 게 경찰의 계획이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겼다. 한 유력 언론이 납치범의 메모 내용을 입수해 그대로 보도했다. 몸값 거래 시간과 장소가 온 세상에 까발려진 것이다. 납치범이 순순히 나타날 리가 없어 보였으나, 경찰은 일단 계획대로 작전을 강행했다. 형사들은 팝콘·아이스크림 판매상 등으로 위장한 채 현장에 배치됐고, 취재에 나선 기자들도 작전에 협조하면서 변장하거나 카메라를 들고 잠복해 있었다. 약속된 시간에 주앙은 시멘트 상자에 돈을 넣었고, 전 국민은 이를 지켜봤다. 물론 납치범은 끝내 현장에 등장하지 않았다.
본격 수사를 개시한 경찰은 주변인 조사부터 시작했다. 범인은 납치 당시, 카를로스의 집으로 들어갈 때 닫힌 정문 대신 '잘 보이지도 않는' 쪽문을 이용했다. 개들은 짖지도 않았다. 집 구조가 익숙하다는 듯 전기 차단기를 내린 뒤 어둠 속에서 돌아다녔다. 그 집에 몇 번 초대된 적이 있는, 면식범의 소행일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가장 먼저 용의선상에 오른 건 인근 병원 소유주인 마리오 필리졸라였다. 경찰은 그가 부동산 구입 자금으로 큰 지출을 했다는 진술을 받아냈다. 곧이어 필리졸라의 병원에서 목수로 일하던 남성이 체포됐다. 납치범으로부터 직접 쪽지를 건네받았던 카를로스의 누나가 그 목수를 범인이라고 지목했기 때문이다. 경찰은 필리졸라가 목수에게 '카를로스 납치'를 지시한 것으로 판단했다. 헛다리였다. 목수의 직장 동료들이 '범행 시간에 우리와 함께 있었다'며 알리바이를 증명해 줬고, 목수는 구금 사흘 만에 풀려났다.
경찰은 주변인 수사를 계속 이어갔다. 카를로스 집을 수차례 방문했던 정비공은 물론, 마리아를 흠모해 유혹하려던 이웃도 소환 조사를 받았다. 과거 주앙에게 진 빚을 갚지 못해 차량을 빼앗기는 등 금전 다툼을 벌였던 사업가도 한때 체포됐으나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됐다.
시간만 속절없이 흘러갔고, 연신 허탕만 쳤던 경찰은 수사 방향을 틀었다. 부모를 용의선상에 올린 것이다. 경찰은 마리아의 사건 당일 및 직후 행적이 수상하다고 봤다. 신고를 받은 헌병대가 출동했을 때 침착한 표정으로 TV를 시청하고 있었다는 이유에서다. 또 다음 날 경찰에 출석할 땐 값비싼 가발을 쓰고 진한 화장을 한 모습이었는데, '아들이 납치된 엄마 같지 않다'는 게 경찰의 의심이었다. 마리아가 평소 복권 구입에 돈을 자주 쏟아부었고, 주술을 믿었다는 부정적 인식도 의혹을 키우는 데 한몫했다. 하지만 별다른 범행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다음은 아빠였다. 주앙의 제약회사는 당시 재정적 위기에 처해 있었다. 급전이 필요해지자 '아들 납치'라는 자작극을 벌여 기부금을 모으려 했을 수 있다는 게 경찰의 가설이었다. 주앙이 불륜 관계였던 비서와 공모해 범행 계획을 세웠다는 시나리오도 나왔다. 때마침 자신을 납치범이라고 주장하는 아딜손이라는 인물이 나타나면서 수사에도 속도가 붙었다. 아딜손은 "주앙 지시를 받아 카를로스를 납치해 살해한 뒤 시신을 바다에 던졌다"고 주장했다. 주앙은 체포됐다.
그러나 경찰은 주앙이 범행에 관여한 증거를 전혀 찾지 못했다. 아딜손이 지목한 바닷가에서 한 시신을 발견했지만, DNA 검사 결과는 카를로스와 일치하지 않았다. 심지어 아딜손의 자백도 신빙성이 부족한 거짓 주장으로 판명 났다. 주앙은 법원 명령으로 결국 석방됐다.
아들의 생사조차 알 길이 없는 상태가 계속되면서 가정은 파괴됐다. 혐의를 벗긴 했으나 서로에 대한 신뢰를 잃은 주앙과 마리아 부부는 이혼했다. 이미 '아빠가 아들을 죽였다'는 언론 보도까지 나온 뒤였다. '내가 카를로스를 데리고 있으니 돈을 가져오라'는 허위 협박 전화가 잇따라 경찰 수사에도 혼선을 줬다. 아딜손처럼 스스로를 납치범이라고 칭하는 황당한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경찰서를 다녀간 용의자는 무려 100명이 넘었다.
사실상 좌초돼 있던 수사가 다시 탄력을 받게 된 건 사건 발생 4년 만인 1977년. 납치범이 남긴 쪽지의 필체가 주앙의 회사 연구실 직원 실비오 페레이라의 것과 일치한다는 분석이 나왔다. 또 카를로스의 누나가 사건 직후 페레이라를 범인으로 지목했지만 주앙이 묵살했다는 진술도 새롭게 등장했다. 카를로스의 누나는 '페레이라의 연구실에서 다루던 의약품 냄새와 거의 비슷한 냄새를 납치범한테서 맡았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경찰은 주앙에 대한 수사를 재개했다.
재판에 넘겨진 페레이라는 1심에서 유죄가 인정돼 징역 13년을 선고받았다. 마침내 해결되는가 싶었으나, 그가 항소심에서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무죄를 선고받으면서 이 사건은 다시 미궁에 빠졌다. 주앙이 납치를 교사했다는 혐의도 증거가 없어 끝내 입증에 실패했다. 카를로스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했다. 수사는 여기서 사실상 끝났다.
반세기 넘는 세월 동안, "내가 카를로스일지도 모른다"며 가족을 찾아간 이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았다. 주로 어렸을 적 납치나 유괴를 당했던 고아 출신이다. 2006년 나타난 호르헤 소아레스(당시 48세)가 대표적이다. 그는 "어렸을 적 납치됐다가 가까스로 탈출해 아동보호소에서 지냈다"고 했다. 당시의 기억이 카를로스 사건과 상당히 유사했다. 가족은 실낱같은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DNA 검사 결과는 역시나 '불일치'였다. 자신이 카를로스일 수 있다고 주장한 건 소아레스가 12명째였다.
지금도 가족은 '막내'를 기다리고 있다. 주앙은 아들의 행방을 찾기 위해 유럽의 유명 심령술사까지 찾아갔다. 마리아는 여전히 전남편인 주앙을 납치범으로 의심하며, 경찰의 재수사를 요구하고 있다. 마리아는 브라질 일간 오글로브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아요. 단지 내 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