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보다 정치와 출세에 몰두하며 과학을 이념적 아부의 도구로 활용한 스탈린시대 구소련 농학자 트로핌 리센코(1898~1976)의 악명은 동시대 농학자 니콜라이 바빌로프(Nikolay Vavilov, 1887. 11. 25~1943. 1. 26)의 미덕과 흔히 대비된다. 바빌로프에게도 과학은 철저히 수단이었다. 세상과 정치에 아랑곳 않고 오직 ‘과학을 위한 과학’에 몰두하는 학자들과 달리, 그에게 농학(과학)은 오랜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모스크바의 한 영세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굶주리며 성장한 그는 페트로브스카야 농업아카데미(현 모스크바국립농대)를 졸업한 뒤 응용 식물학자 겸 유전 육종학자로서 정부연구기관에서 다양한 이력을 쌓았고, 사라토프대 교수(1917~20)를 거쳐 레닌농업아카데미 소장(1924~35)을 지냈다. 우크라이나 대기근(1932~33) 전부터도 소비에트는 가뭄과 병충해 등으로 인해 만성적인 식량난을 겪고 있었다. 바빌로프는 환경과 병해충 등 외부 위협에 강한 내성을 지닌 감자와 밀 등 식용작물의 육종에 집중하며 10년대 중반부터 약 20년간 무려 5대륙 64개국을 115차례나 탐사했다. 말이 탐사지 사실상 고행이었을 그 과정에서 그는 집요하게 현지 환경을 탐구하고 구황작물 등의 종자를 수집했고, 기후와 식생 다양성 등 다양한 주제의 논문 100여 편을 발표했다.
그 씨앗들로 그는 당시 기준 세계 최대 규모인 레닌그라드 종자은행도 설립했다. 그의 연구원들은 레닌그라드 공성전으로 모두가 굶주림에 지치고 동료들이 아사하는 걸 보면서도 44년 포위가 풀릴 때까지 종자은행의 샘플에는 손대지 않았다. 당시 바빌로프는 거기 있지도 않았다. 그는 41년 반동 부르주아로 체포돼 사형 선고(41)받았고 이듬해 20년형으로 감형받았다가 공성전 와중이던 43년 폐렴으로 옥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