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어 쓰러지며 씨앗들을 지켜낸 연구원들, 그들을 키워낸 농학자

입력
2024.01.26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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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니콜라이 바빌로프

연구보다 정치와 출세에 몰두하며 과학을 이념적 아부의 도구로 활용한 스탈린시대 구소련 농학자 트로핌 리센코(1898~1976)의 악명은 동시대 농학자 니콜라이 바빌로프(Nikolay Vavilov, 1887. 11. 25~1943. 1. 26)의 미덕과 흔히 대비된다. 바빌로프에게도 과학은 철저히 수단이었다. 세상과 정치에 아랑곳 않고 오직 ‘과학을 위한 과학’에 몰두하는 학자들과 달리, 그에게 농학(과학)은 오랜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모스크바의 한 영세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굶주리며 성장한 그는 페트로브스카야 농업아카데미(현 모스크바국립농대)를 졸업한 뒤 응용 식물학자 겸 유전 육종학자로서 정부연구기관에서 다양한 이력을 쌓았고, 사라토프대 교수(1917~20)를 거쳐 레닌농업아카데미 소장(1924~35)을 지냈다. 우크라이나 대기근(1932~33) 전부터도 소비에트는 가뭄과 병충해 등으로 인해 만성적인 식량난을 겪고 있었다. 바빌로프는 환경과 병해충 등 외부 위협에 강한 내성을 지닌 감자와 밀 등 식용작물의 육종에 집중하며 10년대 중반부터 약 20년간 무려 5대륙 64개국을 115차례나 탐사했다. 말이 탐사지 사실상 고행이었을 그 과정에서 그는 집요하게 현지 환경을 탐구하고 구황작물 등의 종자를 수집했고, 기후와 식생 다양성 등 다양한 주제의 논문 100여 편을 발표했다.

그 씨앗들로 그는 당시 기준 세계 최대 규모인 레닌그라드 종자은행도 설립했다. 그의 연구원들은 레닌그라드 공성전으로 모두가 굶주림에 지치고 동료들이 아사하는 걸 보면서도 44년 포위가 풀릴 때까지 종자은행의 샘플에는 손대지 않았다. 당시 바빌로프는 거기 있지도 않았다. 그는 41년 반동 부르주아로 체포돼 사형 선고(41)받았고 이듬해 20년형으로 감형받았다가 공성전 와중이던 43년 폐렴으로 옥사했다.





최윤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