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에 딱 1,288개뿐인 ‘신이 내린 일자리’가 있다. 연봉은 평균 1억 원이 넘고, 정년 제한이 없어 70, 80대 고령에도 잘릴 일이 없다. 지원 자격이 엄격하지 않은 데다 채용 정보조차 ‘깜깜이’라 동일인이 십수년째 차지하는 직업. 동네마다 있는 새마을금고 이사장직이다.
이들은 많게는 6조 원의 금고 자산을 굴리며 대출을 최종 승인하거나 고금리 특판 상품을 내놓는다. 또, 금고 직원들의 인사권도 손에 쥐고 있다. 각 금고가 독립 법인인 점을 감안하면 ‘작은 은행장’인 셈이다. 하지만 돈을 맡긴 고객들조차 이들이 얼마나 전문성이 있는지, 몇 년째 금고를 장악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공시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일보는 장막 뒤에 숨은 지역 새마을금고 이사장들의 면면을 정밀 분석했다. 중·대형 금고로 볼 수 있는 자산규모 2,000억 원 이상(지난해 6월 기준) 451곳의 현직 이사장 450명(공석인 서울 남대문충무로 금고 제외)을 대상으로 했다. 전문성, 청렴성 등을 엿볼 수 있는 주요 이력과 재임기간 등을 중심으로 특징을 살폈으며, 각 금고의 법인 등기부와 공시 자료, 언론 보도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자료 등을 토대로 분석했다. 하지만 재임기간조차 파악할 수 없는 이사장이 3분의 1이나 될 정도로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개별 금고 감독권이 있는 새마을금고중앙회는 이사장의 기본 이력을 알려 달라는 본지 요청에 '개인 정보라 가지고 있지 않다'며 거부했다.
새마을금고 이사장의 전직을 분석한 결과 크게 세 갈래로 나뉘었다. ①지역 정치인 ②해당 금고 직원 ③지역 유지 등이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정치인 출신 금고지기다. 분석 대상인 450명 중 최소 41명(9.1%)이 시군구 의원 등 정치를 경험(낙선자 포함)한 후 이사장이 됐다. 동네 표심을 잡아야 구직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초의원과 금고 이사장은 공통점이 있다. 조형곤 서민금융선진화시민연대 공동대표는 “지역에서 힘깨나 쓰는 사람이 한자리하고 싶을 때 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기초의원과 새마을금고 이사장”이라면서 “이사장이 연봉도 높고, 공적 감시도 덜 받기에 훨씬 '알짜'로 통한다"고 말했다.
실제 급여 수준만 놓고 보면 금고 이사장직이 정치인보다 매력 있다. 중앙회에 따르면 전국 1,288개 금고 이사장의 평균 연봉(임금+업무추진비 등)은 약 1억1,300만 원(2023년 기준)으로 기초의원(연 4,195만 원)보다 갑절 이상 높았고, 광역의원 급여(연 6,112만 원)와도 차이가 컸다.
정치판을 경험한 인물이라도 금고를 건전하게 운영한다면 나쁘게만 볼 게 없다. 협동조합 특성상 동네 정서에 밝은 정치인이 금고 주요 고객인 지역 소상공인 등의 가려운 부분을 잘 긁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융기관 수장을 맡으며 계속 정치권에 기웃거리는 건 문제다. 새마을금고법에는 '금고와 중앙회는 정치에 관여하는 일체의 행위를 할 수 없다'고 명시돼 있다. 하지만 정치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이사장들이 적지 않다. 중앙회 이사이기도 한 안세찬 전남 순천북부 금고 이사장은 금고 운영을 맡던 2014년 순천시장 예비 경선에 뛰어들었다. 그는 한국일보 통화에서 "당선되면 이사장은 그만둘 생각이었다"고 했다. 그는 2000년부터 금고 이사장을 맡았는데, 그사이 순천시장 자리에 3차례나 도전했다. 조용수 울산미래새마을금고 이사장도 1992년 이후 '시의원금고 이사장구청장금고 이사장'을 오가는 행보를 보였다.
정치적 사심을 두고 금융기관을 운영하면 큰 탈이 날 수 있다. 새마을금고 내부 사정을 잘 아는 관계자는 "금고 이사장이 지역 유지와 친분을 쌓으려고 리스크가 큰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대출 등을 내주려는 일들이 있다"면서 "중앙회 실무자가 심사해 '투자 불가'로 판단하면 윗선에 연락해 '내가 지역에서 큰일 해보려고 하는데 실무자는 뭐하는 놈이냐'고 따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지역 이사장은 중앙회장 선거 때 투표권을 가지고 있기에 무시하기 어렵다.
반대로 금고 이사장 등의 이력을 발판 삼아 정치권에 입성한 이들도 많다. 현직 지방의원 중 금고 임원 경력자는 총 21명이 있고 이 가운데 5명은 이사장 출신이다. 황석칠(67·국민의힘) 부산시의원과 성낙욱(64·국민의힘) 부산 진구의원, 최홍찬(65·국민의힘) 부산 연제구의원, 안해성(69·국민의힘) 충북 음성군의원, 조팔도(69·국민의힘) 경남 김해시의원 등이다.
금고 이사장 중 금융 전문성을 갖춘 이는 매우 적었다. 본지가 자료 분석 등을 통해 확인한 금융 기관 출신 이사장은 76명(16.8%)이었다. 그나마 대부분은 특정 새마을금고에서 일하다가 선거에 출마해 이사장으로 승진한 경우였고, 다른 금융사나 공공금융기관 출신 이사장은 4명뿐이었다.
새마을금고 직원들은 지점과 본점 등에 순환 발령되는 시중은행 직원과 달리 특정 금고에서 평생일한다. 직원 출신이 이사장이 되면 현장 이해도는 높을 수 있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모두 아는 사이라 쉽게 조직을 장악하고 부당대출 등 전횡을 일삼기도 쉽다. 부당 대출을 지시한 혐의 등으로 최근 징역 9년을 선고받은 경기 광명 새마을금고의 윤모(62) 이사장도 이 금고에서 30년 넘게 일한 직원 출신이다.
지역 유지 출신 이사장들도 금융 전문성이 높다고 보기 어렵다. 본지 분석 결과 이사장 10명 중 2명(84명·18.7%)은 해당 지역에서 오랫동안 장사나 사업을 해온 인물이었다. 건설업, 요식업, 운수업, 축산업 등 분야는 다양했는데 지역 상인회 임원으로 활동하며 세를 키운 사람이 많았다.
많게는 수조 원을 운용하는 금융기관 수장 중에 정치인이나 지역 유지 출신이 왜 이렇게 많은 걸까. 새마을금고 이사장을 선거로 뽑기 때문이다. 전체 금고 중 80%가량이 간선제로 이사장을 뽑는다. 금고 전체 회원 중 1%가량인 대의원에게만 투표권이 있다는 의미다. 결국 새마을금고 경영권을 쥐려면 전문성보다는 '지지 기반'이 중요하다. 정치인이나 지역 유지, 새마을금고 내부자 출신이 극도로 유리한 이유다. 서지용 상명대 경영학부 교수는 "능력보다는 대의원과의 직·간접적 유대 관계가 있어야 이사장 선거에서 이기기 쉽다"고 말했다. 소수의 대의원만 자기 편으로 만들면 되다 보니, 선거를 앞두고 돈을 뿌리는 사건도 심심치 않게 터진다.
이처럼 지역에서 세력만 구축해 놓으면 오랜 기간 집권할 수 있다 보니 초고령 이사장이 적지 않다. 본보 취재 결과 대구 북구의 한 금고 이사장은 84세였다. 그는 1989~1993년 금고 이사장을 지낸 뒤 2012년 다시 이사장으로 복귀해 여전히 현직에 있다. 중앙회에 따르면 전체 이사장의 평균연령은 66세다. 지난해 1~8월 선임된 이사장 365명 중 69.9%는 이사장을 이미 한 번 이상 지낸 경험이 있었다. 물갈이가 그만큼 안 된다는 뜻이다.
날림으로 진행되는 금고 이사장 선출 과정을 개선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니다. 국회는 2021년과 2023년 두 차례 새마을금고법을 개정해 이사장 직선제를 도입했고, 일정 금융 경력이 있는 사람만 상임 이사장이나 이사가 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전체의 약 60%를 차지하는 자산 규모 2,000억 원 이하 금고는 여전히 간선제를 택할 수 있는 데다 전문성 기준도 너무 낮다는 지적이 있다.
새마을금고 감사를 지낸 안경묵 서민금융선진화시민연대 대표는 "개정된 법에 따르면 상근임원으로 4년 이상 근무했을 경우 이사장 선거에 출마할 수 있도록 했다"면서 "하지만, 10년을 일해도 지금과 같은 금고 체계에서는 전문성을 키우기 어렵다"고 꼬집었다. 홍기훈 홍익대 경영대학 교수도 "지역민 지지를 얻어 선출된 이사장은 정치권 입장에서는 중요한 '고객'이라 정경유착으로 빠지기 쉽다"며 "국회가 정말 힘을 써야 할 문제에 침묵하는 게 문제"라고 직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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